동아시아 나라들은 17세기 중반부터 200년 동안 큰 전쟁을 겪지 않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 한반도가 무려 5개 전쟁과 연관된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근대가 시작된 이후 전쟁의 지정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해왔다.
평화의 지정학 구축은 북한 핵 문제를 풀려는 노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핵 문제 해결 노력 자체가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없애고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평화체제는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며 공존과 번영을 추구하기 위한 제도와 규범’을 뜻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반도는 지구촌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 한반도 지정학의 기본 조건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으로 지금의 한반도와 비교될 만한 사례를 찾아보자. 우선 고대 중국의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였던 한(韓)나라가 눈에 들어온다. 한나라는 진·제·초·조 등 네 강국이 사방을 에워싼 요충지에 자리했다. 바로 옆에는 같은 나라였다가 갈라진 위가 있었다. 전국시대는 통일의 열망이 큰 시기였기에 평화보다 전쟁을 우선하는 흐름이 갈수록 강해졌다. 합종과 연횡 등 치열한 외교가 이뤄졌으나 결국 무력이 승패를 가름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한나라가 첫 희생자가 됐다. 서쪽의 진나라는 기원전 230년 한나라를 시작으로 불과 9년 만에 여섯 나라를 모두 점령했다.
다른 사례는 유럽대륙 북서쪽의 네덜란드·벨기에다. 두 나라를 둘러싼 영국·프랑스·독일 등 세 나라는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국력 5위 안에 드는 강국이었다. 네덜란드·벨기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탄탄한 중견국이지만, 인구가 많지 않아 주변국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는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2차대전 때 히틀러의 독일에 점령되는 치욕을 겪었다. 같은 뿌리를 가진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분단 이후 지정학적 위상이 낮아진 것도 지금 한반도와 관련해 시사적이다. 두 나라가 2차대전 중인 1944년 룩셈부르크와 함께 관세동맹을 결성해 이후 경제연합으로 발전시킨 것은 ‘전쟁의 지정학’을 ‘평화의 지정학’으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이런 여러 노력에 힘입어 유럽 나라들은 2차대전 이후 전쟁을 겪지 않은 채 공동번영을 이뤄냈다.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은 얼마나 강할까? 수치로 살펴보자. 우선 명목 국내총생산(2016년 국제통화기금 기준)을 보면 미국이 1위(19조4217억달러), 중국이 2위(11조7953억), 일본이 3위(4조8412억), 러시아가 11위(1조5607억)를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12위(1조4981억)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면 순위가 바뀐다. 미국이 명목 생산과 같은 수치로 2위로 떨어지고, 중국이 1위(23조1944억)로 올라간다. 일본도 인도에 이어 4위(5조4202억)가 되지만, 러시아는 6위(3조9380억)로 상승한다. 우리나라는 14위(2조297억)다. 국토 면적에서도 러시아·미국·중국은 각각 1·3·4위를 차지한다. 인구 또한 네 나라가 1위(중국), 3위(미국), 9위(러시아), 10위(일본)에 올라가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 28위, 국토 면적 108위다.
네 나라는 당연히 종합 국력에서도 최상위다. 1960년대부터 쓰인 국력종합지수(CNIC)가 있다. 총인구, 도시인구, 석탄·철 생산, 1차 에너지 소비, 총군사비, 1인당 군사비 등 인구·경제력·군사력에 관련되는 6개 지표를 평균한 것이다. 1위는 단연 미국이다. 지구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8655%에 이른다(2017년 기준). 중국은 2위(7.2464), 일본은 3위(6.2974), 러시아는 5위(4.3694)다. 네 나라를 합치면 37.7787%나 된다. 우리나라는 1.5694%로 11위다. 지구촌에서 1·2·3·5위 강국에 둘러싸인 곳은 한반도밖에 없다. 북한은 경제력과 인구 모두 한참 밑이지만 군사력이 만만찮아 국력이 16위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들은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큰 전쟁을 겪지 않았다. 이런 평화시대는 서세동점과 더불어 급변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전쟁의 시대’였다. 큰 전쟁만 해도 청일전쟁(1894~95년), 러일전쟁(1904~05), 태평양전쟁(1941~45), 1·2차 중국내전(1927~36, 1946~49), 한국전쟁(1950~53), 중인전쟁(1962), 베트남전쟁(1965~75), 중월전쟁(1979) 등 8차례에 이른다.
이들 전쟁은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모두 이념과 목표, 충돌 양상 등에서 서구의 영향력이 뚜렷하다. 청일·러일·태평양전쟁은 서구형 제국을 추구한 일본의 팽창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고, 중국내전과 중인·중월전쟁은 서구에서 도입한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둔 중국의 국민국가 형성 과정과 관련된다. 내전과 국제전 성격을 모두 가진 한국전쟁과 민족해방전쟁인 베트남전쟁 또한 서구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한반도가 이들 가운데 무려 5개 전쟁과 연관된다는 사실은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청일전쟁은 우리 영토에서 이뤄졌다. 그 결과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지 못했다면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 한국전쟁을 통해 냉전의 틀이 굳어졌으며, 우리가 베트남전쟁에 병력을 대거 제공한 것도 이 틀 속에서다. 곧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근대가 시작된 이후 전쟁의 지정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해왔다.
1980년대 이후 수십년 동안 동아시아에선 큰 전쟁이 없었다. 이전과 무엇이 달라진 걸까? 우선 오랜 구질서를 뒤흔들었던 국민국가 형성 과정이 일단락됐다. 동시에 근대화의 수준, 서구 세력과의 관계 등에 의해 상대적으로 등락을 거듭했던 각국의 국력이 예측 가능한 변화의 길로 들어섰다. 이제 어느 나라든 마음대로 급격한 질서 변화를 꾀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의 하나로 꼽히는 ‘동아시아의 고도성장’도 역내 갈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그렇다고 근대 이전과 같은 평화시대가 다시 온 것은 아니다. 평화의 지정학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우선 한반도,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남중국해 도서, 대만해협 등 잠재적 분쟁 지역이 여전하다. 특히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악화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이를 빌미로 한반도 관련국들이 군비 증강을 꾀하는 움직임도 뚜렷하다. 미-일 동맹 강화에 발맞춰 중-러 협력이 동맹 수준으로 진화하는 현실은 불길하다. 국력 1·3위와 2·5위의 대립 구도가 고착된다면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큰 짐이 될 것이다.
이런 구도의 한가운데에 미-중 대결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외정책은 경제 민족주의와 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일방주의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인다. 미국 강경파에게 중국은 ‘미국 경제를 착취하는 악’이자 ‘서구 문명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상정된다. 이런 인식이 물리적인 전쟁으로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미국이 대중국 대결에 서구 문명 전체와 패권의 향방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태가 간단치 않다. 게다가 2위 나라의 국력이 패권국의 80%를 넘어서면 패권에 도전하려는 욕구가 커진다고 한다. 중국은 2020년대에 이 수준에 도달한다.
평화는 우리의 절실한 과제다. 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힘을 키우려는 정치세력들이 각국에 엄연히 존재하는 터여서 더 그렇다. 북한 정권은 전쟁의 파멸적 결과를 담보로 벼랑 끝 전술을 펼친다. 한국·미국·일본의 강경우파 세력과 중국·러시아 또한 위기를 강조하며 적대적 공생을 꾀한다.
평화의 지정학 구축은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풀려는 노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핵 문제 해결 노력 자체가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없애고 동북아 전체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평화체제는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며 공존과 번영을 추구하기 위한 제도와 규범’을 뜻한다. 평화협정, 안보대화, 군사협력기구, 군축, 초국적 시민연대 등이 그 내용을 이룬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평화의 지정학은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평화의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
최근 이민·난민과 경제 문제 등으로 흔들리긴 하지만 유럽연합(EU)은 평화체제의 한 모델이 된다. 평화의 지정학 구축에 성공한다면, 조기 통일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한반도는 앞으로 수십년 동안 지구촌이 부러워하는 지역이 될 것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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