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06 18:11
수정 : 2018.06.06 19:15
김지석
대기자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오는 12일 열린다. ‘비핵화-평화체제 열차’가 마침내 출발선에 섰다. 새로운 한반도 시대의 시작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번 회담에서 약속할 비핵화 조처의 최대치는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국외 이전 발표다. 미국이 강하게 요구해온 내용이다. 최소치는 명확한 일정표 없이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다시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깨지지는 않더라도 회의론이 커지기 쉽다. 실제로는 최소와 최대의 중간치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핵·미사일 및 관련 시설에 대한 신고와 사찰 수용이 그것이다.
비핵화 협의는 최근의 북-미, 남북 접촉을 통해 상당 부분 진척되고 있다. 그에 상응하는 평화체제 논의는 그렇지 못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에서 무엇을 제시할지 여전히 모호하다. 미국은 ‘비핵화가 되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고 번영을 지원하겠다’는 막연한 얘기만 한다. 구체적 내용은 사실상 종전선언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종전선언에 트럼프 대통령이 호의적인 쪽으로 돌아선 것은 중요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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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정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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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이 기존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미국과 북한이 불가침을 약속하는 성격을 갖는다. 1992년 2월 발효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한 모델이다. 이 합의서는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서로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않는다”(9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1조), “남과 북은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4조)라고 했다.
이후 이 합의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핵심적인 이유는 핵 문제 악화다. 바꿔 말해 종전선언은 비핵화와 병행할 때만 의미가 있다. 북-미 정상회담 직후나 정전협정 체결 65돌인 7월27일에 맞춰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비핵화-평화체제 열차는 큰 동력을 얻는다.
미국은 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지금까지 핵 폐기를 협상의 입구로 보는 입장을 거의 바꾸지 않고 있다. 이런 입구론은, 핵 폐기를 협상의 마지막으로 보는 북한의 출구론과 거리가 멀다. 미국이 입구론에 기우는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우선 미국 내 여론, 특히 외교·안보 기득권층이 대북 협상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러잖아도 정치적 자산이 취약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비핵화 초기에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줄 필요도 있다. 미국의 대북 직접 지원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우는 미국우선주의 정책 기조에 어긋나거니와 국내 반발이 만만찮다. ‘한국과 중국, 일본 같은 이웃 나라들이 대북 경제지원을 주도할 것’이라는 그의 발언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현재 미국이 앞세우는 힘은 북한과 한반도 관련국에 무엇을 제공하는 역량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통제 권력’이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강화하거나 풀 수 있고, 북한의 국제 금융시장 진입을 막거나 허용할 수 있다.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거나 완화할 수 있고, 대북 협상 속도를 높이거나 협상 결렬을 선언할 수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일본·중국·러시아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거나 협력 수준을 높일 수 있다. 패권국만이 갖는 이 힘은 분명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통제 권력에만 의존해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이룰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 직후 신속하게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다면 12일 북-미 회담도 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핵 폐기에 들어갈 비용의 분담과 경제지원도 미국이 한발 물러설 일이 아니다. 미국이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수준으로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북한과 관련국은 미국의 의지를 의심할 수 있다. 대북 경제지원 역시 관련 프로젝트들을 민간자본이 주도한다고 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적극적 태도를 보여야 원활하게 굴러간다.
비핵화-평화체제 열차가 잘 달리려면 미국의 태도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당장 북-미 사이 거리를 좁혀 비핵화-평화체제 시간표를 완성하는 일만 해도 그렇다. ‘비핵화 조처를 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겠다’는 식이어선 안 된다.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는 어느 때보다 분명해 보인다. 그로선 나라의 명운과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도박이다. 약소국인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 길이기도 하다. 미국이 패권국의 타성에 안주해 이런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엄청난 실패가 아닐 수 없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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