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드룸프(Drumpf)는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 출신이다. 1885년 16살 때 미국으로 간 그는 7년 뒤 트럼프(Trump)라는 이름으로 시민권을 얻었다. 이후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서부에서 식당·숙박·부동산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는 32살 때 고향에서 신부를 데려와 뉴욕에 정착했다. 트럼프가 아버지에 이어 젊은 시절부터 부동산·건축업으로 부자가 된 뿌리에는 이민자인 할아버지의 억척스러움이 있다. 세계를 상대로 한 ‘트럼프의 전쟁’ 앞쪽에 이민자와 독일이 있는 점은 역설적이다. 16일 끝난 유럽 순방에서, 트럼프가 독일의 러시아 천연가스 대량 구매를 비난하며 ‘러시아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포로’라고 한 발언은 노골적인 적대감의 표현이다. ‘미국의 최대 적이 누구냐’는 질문에 독일이 이끄는 유럽연합(EU)을 가장 먼저 꼽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혐오하지 않는다면 “수십만명의 이민자 탓에 독일의 범죄 발생률이 올라가고 있다”는 엉터리 주장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친구로 자리를 잡고 있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의혹과 관련해, 미국 수사기관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말에 더 무게를 둔 그의 태도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미국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 탓에 러시아와의 관계는 최악이었다”는 등 러시아를 부각하고 미국을 깎아내리는 발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뒤집는 트럼프의 이런 모습은 단기 이익에 치중하는 미국우선주의를 반영하지만, 그 배경에는 군사력에 바탕을 둔 일방주의가 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방위비 문제만 봐도 그렇다. 트럼프는 유럽 동맹국들에 현재 2%가 채 안 되는 국내총생산 대비 국방비 지출을 4%까지 늘리라고 압박한다. 여기에는 분명 미국산 무기 수출을 늘리려는 의도가 있지만, 그의 친러 외교와는 정면으로 어긋난다. 대러 협력을 추구한다면 러시아를 주적으로 상정한 나토 체제를 크게 바꾸고 군사비 지출도 크게 줄여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강한 군사력이 없으면 미국우선주의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진짜 전쟁을 벌이려고 힘을 축적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 대상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2년 이라크·북한과 함께 ‘악의 축’ 나라로 지목한 이란이다. 이라크는 2003년 미국이 침공해 정권을 무너뜨렸고, 북한과 관련해선 지난 6월 정상회담에 이은 비핵화 협상이 진행 중이다. 이제 이란이 남았는데, 이란을 굴복시키는 것은 트럼프뿐만 아니라 부시 정부에 이어 지금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네오콘의 핵심 목표다. 그런데 영국을 제외한 유럽 주요국은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으며 이란 문제에서도 미국과 입장이 다르다. 양쪽의 갈등은 지난 5월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 핵협정 탈퇴 이후 조금씩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도되는 트럼프의 친러 외교에는 러시아가 중동 문제에서 힘을 보태줄 거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트럼프 외교가 유럽과 중동 등에서 새로운 분열선과 적대감을 만들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북-미 화해 움직임은 어느 나라에도 위협이 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북한은 유럽연합이나 러시아, 이란 등과 비교해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훨씬 위상이 떨어진다. 북한의 힘은 지정학적 위치에서 나온다. 이는 북한이 지정학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개혁의 길을 가면 주변 나라들 또한 모두 혜택을 볼 수 있음을 뜻한다. 문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으로 향하는 트럼프 정부의 역량이다. 의지는 분명하나 협상력이 너무 취약하고 일관된 전략도 부족하다. 트럼프가 최근 언급하기 시작한 단계적 동시 조처와 속도 조절도 내용이 빈약하다. 종전선언 등 평화체제로 향하는 초기 조처에서 시작해 제재 완화와 관계 정상화로 이어지는 효과적인 카드는 감춰두고 북한의 비핵화만 압박하는 과거 행태를 되풀이한다. 교착 조짐을 보이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노력이 중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과 북한의 협상 항목과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종합 목록이라도 만들어 두 나라를 설득해야 할 때다. 비핵화 성과는 다른 지역에서 시도되는 트럼프의 전쟁에 대한 일정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jkim@hani.co.kr
칼럼 |
[김지석 칼럼] ‘트럼프의 전쟁’과 대북 협상 |
대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드룸프(Drumpf)는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 출신이다. 1885년 16살 때 미국으로 간 그는 7년 뒤 트럼프(Trump)라는 이름으로 시민권을 얻었다. 이후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서부에서 식당·숙박·부동산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는 32살 때 고향에서 신부를 데려와 뉴욕에 정착했다. 트럼프가 아버지에 이어 젊은 시절부터 부동산·건축업으로 부자가 된 뿌리에는 이민자인 할아버지의 억척스러움이 있다. 세계를 상대로 한 ‘트럼프의 전쟁’ 앞쪽에 이민자와 독일이 있는 점은 역설적이다. 16일 끝난 유럽 순방에서, 트럼프가 독일의 러시아 천연가스 대량 구매를 비난하며 ‘러시아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포로’라고 한 발언은 노골적인 적대감의 표현이다. ‘미국의 최대 적이 누구냐’는 질문에 독일이 이끄는 유럽연합(EU)을 가장 먼저 꼽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혐오하지 않는다면 “수십만명의 이민자 탓에 독일의 범죄 발생률이 올라가고 있다”는 엉터리 주장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트럼프의 친구로 자리를 잡고 있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의혹과 관련해, 미국 수사기관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말에 더 무게를 둔 그의 태도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미국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 탓에 러시아와의 관계는 최악이었다”는 등 러시아를 부각하고 미국을 깎아내리는 발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뒤집는 트럼프의 이런 모습은 단기 이익에 치중하는 미국우선주의를 반영하지만, 그 배경에는 군사력에 바탕을 둔 일방주의가 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방위비 문제만 봐도 그렇다. 트럼프는 유럽 동맹국들에 현재 2%가 채 안 되는 국내총생산 대비 국방비 지출을 4%까지 늘리라고 압박한다. 여기에는 분명 미국산 무기 수출을 늘리려는 의도가 있지만, 그의 친러 외교와는 정면으로 어긋난다. 대러 협력을 추구한다면 러시아를 주적으로 상정한 나토 체제를 크게 바꾸고 군사비 지출도 크게 줄여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강한 군사력이 없으면 미국우선주의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진짜 전쟁을 벌이려고 힘을 축적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 대상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2년 이라크·북한과 함께 ‘악의 축’ 나라로 지목한 이란이다. 이라크는 2003년 미국이 침공해 정권을 무너뜨렸고, 북한과 관련해선 지난 6월 정상회담에 이은 비핵화 협상이 진행 중이다. 이제 이란이 남았는데, 이란을 굴복시키는 것은 트럼프뿐만 아니라 부시 정부에 이어 지금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네오콘의 핵심 목표다. 그런데 영국을 제외한 유럽 주요국은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으며 이란 문제에서도 미국과 입장이 다르다. 양쪽의 갈등은 지난 5월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 핵협정 탈퇴 이후 조금씩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도되는 트럼프의 친러 외교에는 러시아가 중동 문제에서 힘을 보태줄 거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트럼프 외교가 유럽과 중동 등에서 새로운 분열선과 적대감을 만들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북-미 화해 움직임은 어느 나라에도 위협이 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북한은 유럽연합이나 러시아, 이란 등과 비교해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훨씬 위상이 떨어진다. 북한의 힘은 지정학적 위치에서 나온다. 이는 북한이 지정학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개혁의 길을 가면 주변 나라들 또한 모두 혜택을 볼 수 있음을 뜻한다. 문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으로 향하는 트럼프 정부의 역량이다. 의지는 분명하나 협상력이 너무 취약하고 일관된 전략도 부족하다. 트럼프가 최근 언급하기 시작한 단계적 동시 조처와 속도 조절도 내용이 빈약하다. 종전선언 등 평화체제로 향하는 초기 조처에서 시작해 제재 완화와 관계 정상화로 이어지는 효과적인 카드는 감춰두고 북한의 비핵화만 압박하는 과거 행태를 되풀이한다. 교착 조짐을 보이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노력이 중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과 북한의 협상 항목과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종합 목록이라도 만들어 두 나라를 설득해야 할 때다. 비핵화 성과는 다른 지역에서 시도되는 트럼프의 전쟁에 대한 일정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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