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교착 상황은 북한보다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늦기 전에 협상팀을 재정비하고 관련국과 긴밀하게 협의해 합리적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의 핵 목록 제출은 종전선언에 더해 연락사무소 개설 수준의 북-미 관계 진전이 있어야 균형이 맞는다.
대기자 기세 좋게 출발한 ‘비핵화-평화체제’ 열차가 속도를 떨어뜨리더니 이제 거의 정지 상태다. 최종 목적지까지 단숨에 갈 수 있다는 낙관은커녕 동력 상실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최근 떠오른 쟁점은 종전선언이다. 이와 관련한 논의가 길어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이 선언의 성격에 대한 생각 차이가 있다. 우리 정부는 적대 관계를 종식하고 비핵화를 견인할 정치적 선언으로 본다. 중국도 비슷하다. 왕이 외교부장은 며칠 전 “종전선언 이슈는 우리 시대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고 남북한을 포함해 모든 국가·국민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미국 정부는 종전선언을 하면 대북 군사 옵션 제약 등 법적 의무가 생기는 것으로 여긴다. 북한은 종전선언을 ‘한반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공동 노력’(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둘째 항)의 첫 단계로 본다. 두 나라가 생각하는 종전선언의 무게는 다른 나라보다 크다. 북한과 미국의 태도는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 대한 기본 입장과 연결된다. 미국은 종전선언에 앞서 북한의 핵 관련 목록 제출 등 ‘비핵화를 위한 상당한 움직임’을 요구한다. 북한은 리용호 외무상이 지난 4일 밝혔듯이, 정상회담 공동성명 4개 항을 동시·단계·균형적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말대로 북한은 새 북-미 관계, 평화체제 구축, 완전한 비핵화, 미군 유해 송환 등 4개 항 가운데 뒤쪽 2개 항에서 핵실험 및 로켓발사 시험 중지, 핵실험장 및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기 등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 미국이 이제까지 한-미 군사훈련 일시 중단만 내놓은 것과 대조가 된다. 객관적으로 볼 때, 현재의 교착 상황은 북한보다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 미국 정부는 정상회담을 통해 ‘상호 신뢰 구축’을 중시하는 새 틀에 합의한 뒤에도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비핵화 우선’ 노선을 완고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협상의 칼자루를 쥔 쪽은 미국이지만, 미국 정부는 아직 비핵화-평화체제 열차가 끝까지 잘 달리도록 하기 위한 로드맵(청사진)을 제시한 적이 없다. 미국은 협상력에서도 심각한 허점을 드러낸다. 협상 주역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 쪽 상대를 여러 차례 만났으나 어떤 방안을 갖고 무엇을 진전시켰는지 구체적 내용이 거의 없다. 원칙적 얘기만 되풀이하는 것은 협상이 아니다. 게다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가끔 딴소리를 한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외교를 관장하는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지난해 3월 이래 공석이고, 성 김 주필리핀 대사가 땜빵으로 대북 접촉에 계속 등장하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한마디로 미국 협상팀은 지리멸렬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늦기 전에 협상팀을 재정비하고 관련국과 긴밀하게 협의해 합리적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별생각 없이 북-미 공동성명을 발표한 게 아니라면, 성명 내용에 걸맞은 일정표가 필수다. 공동성명 1항인 새 북-미 관계는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 제재 완화, 경제·사회 등 분야별 협력, 관계 정상화 등의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2항인 평화체제 구축은 종전선언, 평화협정, 국제 평화·안보 체제 마련 등을 내용으로 한다. 3항인 완전한 비핵화는 핵·미사일 관련 목록 제출, 국제 사찰, 폐기, 검증 등의 절차를 예상할 수 있다. 종합하면, 지금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의 핵 목록 제출은 종전선언에 더해 연락사무소 개설 수준의 북-미 관계 진전이 있어야 균형이 맞는다. 미국과 북한이 각각 핵 관련 목록 제출과 종전선언을 선후 관계로 접근한다면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앞으로 어떤 조처를 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을 크게 줄여주는 게 로드맵이다. 종전선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 선언이 전체 과정의 어디에 자리하며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쓸데없는 갈등이 불거지지 않는다. 남북정상회담 판문점선언에서 밝히고 트럼프 대통령이 확인했듯이, 종전선언은 ‘평화협정 등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의 출발점이다. 이전 버락 오바마 정부와 조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북한의 항복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과감하게 바꿔 새 길을 연 것은 큰 업적이다. 이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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