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 설득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의 대안도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방향은 판문점 선언의 성실한 이행을 바탕으로 남북이 비핵화 논의를 본격화하는 것이다. 북한 체제 안보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가 제공한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기자 도널드 트럼프(72) 미국 대통령은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이다. 사업 기회를 보는 눈이 발달했지만, 성공만큼이나 실패도 많아 여섯 차례나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부동산 개발에는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사업 인허가와 자금 동원이 그것이다. 그는 여기서 합법과 탈법·불법을 넘나들었다. 여러 나라·지방 정부와 정경유착을 서슴지 않았고, 검은돈과 얽히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세탁을 꾀하는 러시아 돈이 많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행태는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서도 나타난다. 단기 이익을 앞세우는 극도의 현실주의, 규범을 우습게 여기는 돌출 행보, 은밀한 친구(예를 들어 러시아)에 대한 ‘공범자적 의리’ 등이 그렇다. 그가 이번 주로 잡혔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평양 방문을 지난 24일(현지시각) 돌연 취소한 것은 정말 ‘트럼프스럽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에게 보낸 강경한 내용의 편지가 영향을 끼쳤다는 보도가 나오지만, 트럼프가 내놓은 핵심 이유는 중국이다. 그는 “폼페이오 장관은 가고 싶어하지만, 중국과 무역관계가 해결된 뒤에 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28일 미국의 유일한 우호적 대북 조처인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더 계속할 계획이 없다’고 밝혀 강경 분위기를 확인했다. 트럼프가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을 미-중 무역 갈등과 연계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6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 협상이 제대로 진전되지 않은 최대 이유는 칼자루를 쥔 미국이 균형 잡힌 안을 만들어 일관되게 추진하지 않은 데 있다. 중국이 이런 협상에 반대할 이유도, 북한이 중국을 의식해 협상을 미룰 아무런 이유도 없다. 대중 무역 갈등을 빌미로 삼는다면 스스로 외교력 부족과 정부 내 난맥상을 실토하는 것일 뿐이다. ‘무역 문제 때문에 중국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고 있지 않다’는 말은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일방적 주장이다. 미-중 무역 갈등은 두 나라의 패권 경쟁과 얽혀 있어 하루아침에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을 그 뒤로 넘기자는 말은 당분간 협상을 안 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한반도와 관련한 여러 문제가 미-중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작동하는 건 사실이지만,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의 큰 방향이 잡힌 지금 분위기에선 협상 진전이 패권 경쟁을 완화할 수 있지 그 역은 아니다. 거꾸로 협상을 뒷전에 제쳐놓고 패권 경쟁을 우선한다면 한반도 문제까지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9월 중순 열릴 남북 정상회담과 18일 개막하는 유엔 총회가 더 중요해졌다. 무엇보다 북한과 미국이 ‘새로운 관계 구축, 평화체제, 비핵화’에 합의한 정상회담의 정신에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핵 신고와 종전선언을 둘러싼 지루한 줄다리기는 이 정신에 어긋나는 다른 요소를 끼워 넣기 때문이다. 특히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이해득실을 우선하는 듯한 트럼프와 북한의 태도는 우려할 만하다. 두 나라 설득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의 대안도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방향은 판문점 선언의 성실한 이행을 바탕으로 남북이 비핵화 논의를 본격화하는 것이다. 비핵화와 체제 안보가 함께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 새로운 북-미 관계가 필요하다는 북한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이 공식에만 얽매이면 미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비핵화 열차는 앞으로 달리지 못한다. 애초부터 한반도 평화체제의 주체는 남북한이다. 북한 체제 안보의 중요한 부분을 우리가 제공한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 힘은 한계가 있고 한-미 공조가 삐걱거린다면 미국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 동아시아 패권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미 갈등이 크게 불거질 수 있다. 그러나 북-미 협상 동력이 떨어지는데도 속절없이 기다리기보다는 힘들어도 우리가 먼저 행동하면서 비핵화를 견인하는 쪽이 낫다. 이런 각오로 나서야 북한과 미국의 태도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비핵화-평화체제 협상은 새 질서 구축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쉬울 수가 없다. 지속적 동력이 없으면 작은 장애물에도 멈춘다. 우리가 그 동력을 만드는 원천이 돼야 한다. 지구촌 어디보다 ‘스트롱맨’이 필요한 곳이 바로 한반도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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