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6.18 17:53 수정 : 2018.06.19 11:34

정의길
선임기자

트럼프가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고, 북한과 새 핵합의를 한 것은 ‘석양의 무법자’의 3자 결투를 연상시킨다. 트럼프에게 핵을 가진 북한은 더 급박한 위협이다. 상호 신뢰 구축이란 현실적 필요성을 인정했다. 장사에서 신뢰란 서로의 이익이 있는 한 지켜진다.

한국에서 ‘석양의 무법자’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서부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 주인공 블론디는 금화를 찾는 경쟁자인 ‘나쁜 놈’ 아이즈 및 ‘추한 놈’ 투코와 3자 결투를 벌인다. 이미 전날 밤 투코의 총에서 탄환을 제거한 블론디는 아이즈만을 상대해 결투를 승리로 이끈다. 블론디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장전한 총을 가진 사람과 땅을 파는 사람이다”라며, 투코에게 땅을 파서 금화를 캐라고 명령한다.

영국의 보수적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국제 핵합의는 깨면서 북한과는 새로운 핵합의를 하는 이유를 이 영화 장면으로 설명한다. 이란은 핵이라는 탄환이 제거된 ‘추한 놈’이고, 북한은 핵을 장전한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가 타결한 국제 핵합의로 이란은 핵개발이 유예됐고, 짧은 기간이나마 제재 해제의 단물을 맛보았다. 이 단물을 맛본 이란은 미국의 제재 재개에도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핵합의를 유지시키려 하며, 옛날 같은 핵개발의 결기를 보이지 못한다. 명백하게 핵개발로 나아간다면 트럼프의 명분만 정당화시키게 됐다. 트럼프는 이란의 이런 처지를 이용해 중동 동맹국들에 무기를 팔고 이란의 영향력 확장을 마음껏 봉쇄할 수 있게 됐다.

반면 북한은, 이란과의 핵합의에 치중하며 ‘전략적 인내’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무시하던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때문에 결과적으로 ‘핵 보유국’이 됐다. 이제 미국에 현존하고 명백한 위험은 이란이 아니라 북한이다.

“그는 완전한 비핵화를 얻지 못할 것이나, 일부는 얻을 것이다. 한편, 북한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대규모 투자는 은둔의 왕국을 비틀어 여는 과정을 시작할 것이다.” 퍼거슨의 논지는 북-미 정상회담이 북한을 제2의 ‘추한 놈’, 제2의 이란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시사다.

퍼거슨은 서방의 패권을 지속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창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이란과 북한은 교정될 수 없는 ‘불량국가’이고 ‘악’일 뿐이다. 그런데 퍼거슨은 북한이라는 ‘더 급박한 악’을 척결하려면, 북한이 가진 탄환인 핵을 먼저 제거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을 인정해야 하고, 트럼프가 이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에는 북한이 더 급박한 위협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워싱턴의 외교안보 주류들은 이에 눈감았다. 선악관에 입각한 미국의 전통적인 이상주의적 외교안보 가치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북한과 주고받기 협상은 무의미하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북한의 일방적 양보가 있고 나서야만 북한을 고려할 수 있다.

분명 트럼프의 외교는 워싱턴의 외교안보 주류들에겐 너무 ‘현실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서방의 전통적 동맹체인 주요 7개국(G7) 회의의 공동성명을 거부해 파탄내고는 다음날 적국인 북한 수장을 만나서는 공동성명에 조인하고 ‘터프하게 국가를 운영한다’고 칭찬했다. 그에게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안보 가치란 의미가 없다. 다른 나라들을 오로지 거래의 대상으로 본다.

트럼프는 퍼거슨의 논지처럼 북한을 유인해 무장해제시키고, 나중에 이란 핵합의 파기 같은 것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북한 역시 핵폐기를 늦추고는 핵보유국 지위를 굳힐 수도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트럼프가 현재로서는 미국에 더 급박한 위협인 북한을 상대로 협상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북한에 ‘시브이아이디’를 강제할 수도 없고, 강제해도 현재로선 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에서 핵심은 “상호 신뢰 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인정하며”라는 문구다. 서로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상대에게 여러가지 조건과 의무를 부과하던 과거 북-미 공동성명과는 달리, 이번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상호 신뢰를 전제로 양쪽의 협력을 강조했다.

현재로선 양쪽이 강조하는 신뢰는 믿을 만하다. 그렇다고 영원하다고 믿을 구석도 없다. 장사에서 신뢰란 서로의 이익이 있는 한 지켜지기 때문이다. 핵폐기를 향한 가시적 조처가 트럼프의 국내 정치나 대북한 제재 해제에도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 한반도 주변 4강의 전략적 이해의 균형을 맞춰야지 신뢰 구축은 계속된다. 김정은이나 트럼프를 불신하거나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Egil@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정의길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