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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2 18:25 수정 : 2017.02.22 20:43

칼 폴라니가 자본의 폭압에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개탄한 산업자본주의 초기의 노동자들조차도 자식과 이웃 동료들의 고통에 아파하고 분노하는 도덕적 힘을 보존하면서 존엄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주류 경제학에 맞서 을의 경제학도 착취와 소외 개념을 통해 경제법칙에 도덕을 끌어들였다.

장흥배
노동당 정책실장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사연을 평온한 기분으로 소화하지 못한다. 의학계는 폐렴 사망자를 2만명으로 보고했고 시민단체는 잠재 피해자 규모를 30만~200만명으로 추산했다.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은 깊고 거대한 비극의 원인을 눈앞에 소환해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죄 없는 수많은 생명의 희생과 살아남은 이들의 투쟁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드러났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작정이나 한 것처럼 무능했다. 최대 피해를 낳은 살균제 원료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은 옥시레킷벤키저가 한국에서만 판매했다고 한다. 이 다국적 기업이 한국에서만 돈을 벌려고 했을 리 없다. 한국 정부만이 PHMG가 희생자들을 찾아다닐 수 있도록 방치했던 셈이다. 4~5년의 피해 기간을 늘린 질병관리본부의 뒤늦은 역학조사, 가습기 살균제의 생활화학가정용품의 안전검사 대상 제외, 유독물질을 활용한 제품의 특허 심사 시 유해성 여부를 조사해야 할 특허청의 직무유기 등이 확인됐다.

기업은 소비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영리 활동에 대해 거의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갖지 않았다. 33개 기업이 PHMG 성분을 무허가로 제조·수입·판매했다. 옥시 쪽의 법률 대리를 맡은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PHMG 독성 실험을 통한 인체 유해 가능성을 확인하고도 의뢰인에게 이를 숨기도록 조언했다는 강한 의혹을 받고 있다.

1970대 미국에서 발생한 ‘포드 핀토’ 사건은 자본주의 안에서 인간의 생명이 취급되는 방식을 선명하게 드러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잘나가던 소형차 핀토는 그러나 연료 탱크의 심각한 안전 결함으로 해마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포드사는 차량 1250만대 전체의 안전성을 개선하는 비용과, 1년에 약 180명이 사망하고 180명이 부상을 당할 경우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액을 서로 비교했다. 전자는 1억3700만달러였고 후자는 4950만달러였다. 한 사람 생명의 평균 시장 가치는 그가 생전에 벌어들일 미래 소득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20만달러로 계산되었다. 포드사는 연료 탱크의 안전 결함을 없애는 대신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 이익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학은 경제법칙을 일종의 자연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것으로 정립해 나감으로써 학문이 다루는 대상에서 도덕을 제외했다. 예를 들어 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 빈민들의 굶주림은 구제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었다. 나뭇잎이 중력에 끌려 떨어지는 것에는 도덕적 의미가 없다.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거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경제체제에 정의나 부정의 같은 가치판단이 성립할 수 없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개인의 의지에 의한 행동만이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경제체제는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형성되고 작동한다는 이유에서다. 도덕관념이 성립되지 않는 경제체제 대고 소득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식의 주문은 공염불이다.

포드 핀토의 소비자들을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구한 것은 포드사나 시장이 아니라 포드사의 부도덕에 분노한 법원의 판결이었다. 생명의 가치를 비용-편익 분석으로 평가했던 포드사의 판단을 입수한 법원은 피해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과 별개로 포드사가 연료 탱크의 안전성 개선을 위한 비용으로 계산했던 금액과 비슷한 액수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오늘날 웬만한 기업들은 윤리 경영, 기업사회책임(CSR) 등의 이름을 가진 도덕 경영 원칙과 활동을 열심히 홍보한다. 삼성전자의 홈페이지 윤리 경영 코너에는 법과 윤리 준수, 고객·주주·종업원 존중, 환경·안전·건강 중시 등 5가지 경영 원칙이 소개되어 있다. 삼성 재벌이 지독하게도 위반해왔던 원칙들이다. 세계 일류급 위선 앞에서 역설적인 한 가지 위안이 있다. 위선은 도덕적 요구의 존재를 전제한다. 삼성의 윤리 경영 표방은 도덕의 이름으로 삼성 재벌의 행태를 비난하고 단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근거는 절대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에서 마련되지 않았다. 칼 폴라니가 자본의 폭압에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개탄한 산업자본주의 초기의 노동자들조차도 자식과 이웃 동료들의 고통에 아파하고 분노하는 도덕적 힘을 보존하면서 존엄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주류 경제학에 맞서 을의 경제학도 착취와 소외 개념을 통해 경제법칙에 도덕을 끌어들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싸움은 국가와 기업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으로서 자본주의를 눈앞에 소환했다. 사람이 이윤 추구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귀하고 존중받는 목적이 되는 도덕적인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의 극복 정도에 달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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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흥배, 을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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