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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08 18:12 수정 : 2018.03.08 20:33

금융위원회가 제·개정 권한을 갖는 보험업 감독규정을 통해 보험업법의 자산운용 규제가 무력화된 상태가 2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금융위가 온갖 궤변으로 완강히 수정을 거부하고 국회도 힘을 못 쓰고 있는 이 기이한 감독규정으로부터 대한민국에서는 삼성그룹 총수 일가만이 특혜를 누리고 있다.

장흥배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정치계와 경제계가 이익을 위해 밀접한 관계를 맺음’이라는 정경유착의 사전적 풀이에는 불법이나 비리 같은 단어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가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과 현대차그룹의 정경유착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힌 대목만 보더라도, 이 말이 쓰이는 맥락은 불법 또는 부패 거래를 전제한다. 노조는 “검찰은 현대차그룹이 다스의 소송 비용으로 삼성보다 더 많은 760만달러를 대납했고 다스에 일감 몰아주기 방식으로 뇌물을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에게 제기된 수많은 범죄 의혹과 다스 사태의 전개 과정을 보면 노조의 주장은 설득력이 크다.

그런데 부패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유럽 국가의 대표적인 정치인들을 보면 정경유착을 불법이나 부패 거래로만 좁게 보는 것은 사태 이해에 일면적일 뿐이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2008년 연봉 100만파운드 조건으로 제이피모건 체이스은행의 고문직에 취임했다. 블레어 총리는 재임 시절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부른 신자유주의 금융 규제완화의 열정적인 옹호자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총선에서 패배한 2005년 러시아의 국영 가스기업 가스프롬 계열사의 의장직에 취임했는데, 총리 재임 시절 이 기업에 특혜를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잘 발달된 ‘이해충돌’ 방지 제도는 한국의 여러 시민단체들한테 공직 인사들의 부패를 막을 매력적인 정책으로 수용돼 왔다. 그러나 미국의 딕 체니 전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부 장관 등 핵심 행정부 각료 대부분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 특수를 누린 회사들과 끈끈한 이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미국의 잘 발달한 이해충돌 방지 제도는 이 관계를 끊어내지 못했다.

재벌그룹의 경영권 승계 및 지배구조와 관련된 법률 개정안들이 행정부와 국회에서 다뤄지는 양태는 명백한 뇌물 거래가 포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경유착의 범주로 다뤄지지 않는다.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보험업법 개정안을 보자. 보험업법은 자산운용의 건전성을 위해 보험사의 계열사에 대한 유가증권 취득을 보험사 총자산의 3%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금융위원회가 제·개정 권한을 갖는 보험업 감독규정을 통해 보험업법의 자산운용 규제가 무력화된 상태가 2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금융위가 온갖 궤변으로 완강히 수정을 거부하고 국회도 힘을 못 쓰고 있는 이 기이한 감독규정으로부터 대한민국에서는 삼성그룹 총수 일가만이 특혜를 누리고 있다. 삼성생명은 2017년 8월 기준으로 보험업법의 자산운용 규제 한도보다 약 20조원 더 많은 삼성전자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같은 위반 상태는 오직 삼성그룹에만 해당하고 이는 총수 일가가 자기 지분 투자 없이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촛불항쟁의 주역 시민들이 깨끗한 정치에 대한 염원으로 선출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다. 족벌 가문 하나의 이해가 전체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의 권능보다 우위에 있는 이 사례는 정경유착이 개별 정치인과 개개 기업인들 사이의 부패 거래를 넘어서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임을 웅변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한 분야인 공공선택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뷰캐넌 교수는 정치인, 정부 관료들이 공익의 대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경제인일 뿐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따라서 경제가 정치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장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행정, 사법, 입법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법과 제도 하나하나가 정치 과정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민주정치의 기본 원리인 현실에서, 이 이론은 결국 시장과 경제를 공동체의 이익에 맞게 규제하고 재조직하는 민주주의와 정치의 권능을 부정하는 길로 간다. 규제완화, 민영화, 공공부문의 축소 등 오늘날 국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몬 신자유주의 처방들이 정경유착의 해법으로 도출되는 것은 이 이론에서 자연스럽다.

오는 14일 이명박이 검찰에 소환된다. 국가 공동체가 노골적인 부패를 추구한 정치인을 징치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박근혜, 이명박이 구속되어도 거대한 정경유착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민주주의의 모든 영역을 뇌물로 매수한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 부패의 역사 그 자체인 보수 정치세력에 맞설 진보세력의 성장을 원천봉쇄한 소선거구 중심의 선거제도야말로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구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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