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성격은 십수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 해결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건 필요한 수단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나설 유인이 없거나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공약을 지키지 않아도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고 누구보다 의정활동을 열심히 해도 낙선되는 정치 환경에서는 ‘시스템 에러’는 반복된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오래전 만난 어느 일본 지식인은 좀체 변하지 않는 자민당 지배 체제를 비판하면서, 그리고 고령화된 일본 ‘운동권’을 안쓰러워하면서 한국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부러워했다. “역동적이란 건 불안정하단 뜻이기도 하다”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아무도 나서지 않고 침잠해 있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했다. 순간 명치가 조금 뜨거워졌다.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4강에 가는 걸 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아이티(IT) 산업에 눈빛 형형한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용감하게 뛰어들던 시절이어서였을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고졸 출신 정치인이 기적처럼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여서였을까. 정말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간다면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란 믿음 같은 게, 그래도 그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몇 년간 취재수첩에 향냄새 마를 날 없이 노동자들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나의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뼈아프게 곱씹어야 했다.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어떨까. 역동성만 보자면 예전보다 더하다. 엄청난 사건들이 매일같이 터져 나온다. 여전히 ‘다이내믹 코리아’다. 하지만 공기가 달라졌다. 과거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외쳤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내뱉는다. 과거에는 사회 거악에 대한 분노가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번져나간 반면, 지금은 ‘갑질 혐오’가 집단적 유희이자 사회정의의 실천이 되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갑과 을을 찾아내는 이 놀이에서 참여자들의 쾌락을 극치까지 올려주는 미션이 하나 있다. ‘사이비 피해자’들, 즉 피해자가 아닌데 피해자인 척하는 자들을 찾아내 공격하는 것이다. 대표적 타깃은 여성, 진보좌파, 전라도 사람, 세월호 유가족, 정규직 노조 등이다. 당장 ‘일베’라는 곳이 떠오른다. 그러나 정도와 빈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종류의 ‘혐오-놀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 어디에서나 목격된다. 세계 여러 나라와 비교해서 한국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교육수준도 높은 사회에 속한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선 시민사회의 성숙도 이례적으로 빠른 편이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나 행복감은 지표와 지나치게 괴리되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가 시작된 이후, 청년층과 노년층 자살률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높은 사회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재해로 죽는 노동자 수에서도 한국은 오랫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 1위를 지키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미개한 헬조선이니까!”라고 답하는 이들도 있을 테다. 신랄하긴 한데 그런 레토릭은 사태를 거의 설명해주지 못한다. 기이한 비참에는 그에 걸맞은 이유와 원인들이 있는 법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저 문제들의 성격은 십수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건 복잡하니 차치해두더라도, 문제 해결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이유는 간단히 설명 가능하다. 필요한 수단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나설 유인이 없거나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공약을 지키지 않아도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고 누구보다 의정활동을 열심히 해도 낙선되는 정치 환경에서는 공적 의제가 무시되거나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 그런 사회에선 필연적으로 ‘시스템 에러’가 반복된다. 문제가 터지면 며칠 시끄럽다가 현장 책임자 몇몇이 징계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고 이내 까맣게 잊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지나 또다시 사건이 벌어지고, 비슷한 과정을 밟는다. 연재 제목인 ‘다이내믹 도넛’의 ‘도넛’은 끝없이 회귀하는 닫힌 고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항상 요동치지만 끝내 변하지 않는 사회’의 알레고리다. 현 정권의 무능과 비도덕이 실로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앞으로 이 지면에선 정권 비판보다 호흡이 더 긴 이야기를 하려 한다. 1등 정당과 2등 정당의 순위가 바뀌거나, 그들 사이에서 정권이 교체될지라도 변하지 않는 어떤 ‘단단한 것’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를 틀 지우고 있지만 우리는 이걸 억압이나 착취라 여기기는커녕 세계를 지탱하는 질서라고 믿는다. 또한 우린 이걸 깨뜨리거나 벗어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으며, 설령 상상하더라도 금세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어질 글을 통해 그 ‘단단한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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