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배 집단 내부의 저항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지배 집단의 시도는
수천년 전부터 존재했지만
‘순수’와 ‘불순’ 같은 오염, 위생에 대한
감각을 결부시켜 공론장에서 호명하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부터다.
군부독재 시절엔 ‘외부세력’보다
불순·불온·좌경용공세력이 애용됐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이화여대의 ‘미래라이프 대학’ 철회 시위, 성주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은 전혀 다른 이슈지만 공통점이 있다. “외부세력”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는 것. 이대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타 대학의 연대투쟁 제의는 물론, 이대 내부의 운동권들도 철저히 차단했다. 세월호 리본, 메갈리아 티셔츠, 위안부 팔찌 착용도 금지했다. 경찰 1600명을 투입하며 강공을 펼친 교육부와 대학 쪽은 여론전에서 밀리며 결국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을 철회했다. 이대 학생들에게 “지도부 없는 ‘느린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성주 투쟁 역시 “외부세력”이 큰 논란거리였다. 정권, 극우신문, 종편방송은 사태 초기부터 ‘당사자 대 외부세력’ 프레임으로 성주 주민들을 고립시키려 했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이 프레임에 정면으로 맞서 큰 호응을 얻었다. “성주에 주민등록 기재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외부세력이라고 하면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방부 장관도 외부세력이다!” 이대, 성주만이 아니다. 어떤 사회적 저항이 일어나면 곧장 튀어나오는 말이 “외부세력” 운운이다. 세월호 유족 역시 “순수 유가족”과 아닌 유가족으로 나뉘어 끝없이 모욕당해야 했다. 이 “외부세력”이란 말, 누가 언제부터 썼을까? 피지배 집단 내부의 저항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지배 집단의 시도는 수천년 전부터 존재했지만, ‘순수’와 ‘불순’ 같은 오염, 위생에 대한 감각을 결부시켜 공론장에서 호명하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부터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엔 “외부세력”보다 “불순세력” “불온세력” “좌경용공세력” 같은 말이 애용되었다. 단어 자체는 조금씩 다르지만 기능은 동일했다. 저항의 확산을 막고 분열시키는 것이다. “외부세력”의 뿌리는 그러나 군부독재 시기가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외부세력”의 원형과도 같은 말이 처음 나타났으니, 바로 ‘불령선인’(不逞鮮人·후테이센진)이다. 불령선인은 ‘일본에 저항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불온한 조선인’으로, 온건하고 선량한 조선인을 부추겨 소요와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불령선인이 전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겠으나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불령선인이라 할 수 있었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의 <전쟁 전 일본 거주 조선인 관련 신문기사 검색(1868~1945)> 자료에 따르면, 불령선인이란 말이 신문에 등장한 건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25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이다. “불령선인이 오사카에 잠입해 조선인 노동자를 선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불령선인은 신문지상에 본격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해 1920년대엔 누구나 쓰는 관용표현이 된다. 1922년엔 좌익 활동가이자 소설가였던 나카니시 이노스케가 잡지 <가이조>(改造)에 <불령선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바로 다음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재난을 틈타 불령선인이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돌며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학살당했다. 오늘날 일본에서 불령선인이라는 말은 차별어로 알려져 있지만 완전히 사라진 단어는 아니다. 재특회 등 극우단체들은 매일같이 거리에 나가 재일조선인을 불령선인이라 부르고 있다. “불령선인”부터 “외부세력”까지, 100년이 흘렀다. ‘순수한 당사자 대 불순한 외부세력’이라는 권력의 올무는 여전히 질기고 치명적이다. 특히 촛불시위 이후부터 저항은 흡사 ‘순수를 증명하는 싸움’처럼 되어갔다. 정치의 냄새, ‘?R’(운동권)의 얼룩이 조금도 묻어선 안 됐다. 저항자는 “순수한 학생” “순수한 주민” “순수한 일반시민”이어야 한다. 이 강박적 자기검열의 바탕에는 권력의 낙인에 대한 공포, 정치인과 운동권, 나아가 동료 시민에 대한 불신이 놓여 있다. 이 공포와 불신은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그러니까 100년 동안 이 ‘순수 대 불순’ 구도를 반복하게 만드는 어떤 ‘경로의존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메시지’의 정당성을 다투어 문제가 해결된 경우가 절망적으로 드물었다는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메시지’보다 ‘메신저’의 순수성을 앞세우는 게 효율적임을 사람들은 알게 된 것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매카시즘을 ‘미국의 반지성주의’로 분석했음을 떠올린다면 이 경로의존성을 ‘한국의 반지성주의’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