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능력주의의 ‘과소’와 능력주의의 ‘과잉’이 공존한다. 양자는 공히 ‘더 많은 불평등’을 생산하는 논리다. 과잉능력주의는 평등을 어떻게 달성할지보다 불평등을 어떻게 정당화할지에 지나치게 몰두해온 사회의 산물이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2, 3년 전쯤의 일이다. 일부 서울대 학생들이 지역·기회 균등 선발제도로 입학한 동료들을 “지균충” “기균충”이라 일상적으로 비하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기성세대가 일제히 비분강개한 적이 있다. 이건 지성의 전당에서 있어선 안 되는 일이고, 나라가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고…. 하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이른바 ‘스카이’(SKY)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백건대 당시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큰 쇼크를 받았다. 저런 일을 난생처음 알게 된 양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던 고매한 선생님들이야말로 진정 충격이고 공포였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에서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지금 대학생’만의 특징이 아니다. 가시화된 시점으로만 쳐도 거의 16년 전인 20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입시정보 사이트 게시판에서 시작된 ‘대학 서열 매기기’ 놀이는 각 대학 ‘훌리건’을 양산했고, 이들은 ‘훌리건 천국’이라는 곳에 모여들었다. 세가 꺾인 지금도 회원이 8만명에 이르는 대형 커뮤니티다. 훌리건들은 다른 대학 게시판으로 몰려가 자신들이 작성한 대학 서열표를 도배하는 짓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했다. ‘듣보잡’이라는 인터넷 유행어도 여기서 만들어졌다(처음에 듣보잡은 ‘듣도 보도 못한 잡대학’이란 뜻이었다). 마흔을 넘긴 내가 아직 대학생이던 무렵에 훌리건들을 학교 게시판에서 목격했으니까, 그야말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온라인 문화였던 셈이다. 최근 발표된 김경근 고려대 교수의 논문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영향 요인에 대한 구조방정식 모형 분석’은 청소년 다수가 능력주의를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장학금을 줄 때 가정 형편보다 성적을 고려해야 한다’ 같은 문항에서 이들은 높은 수준의 능력주의 태도를 보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성향이 본인의 계층이나 학업 성적과 크게 관계없이 고르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각자의 출발선이 아무리 달라도 객관적 지표나 성적에 따라 대우받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아마도, 약자·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 정책(affirmative action)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의 원천일 수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10대부터 30대 중후반에 이르는 청년세대에게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결정적인 틀 중 하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능력주의는 봉건 신분제 사회와 구별되는 근대 사회의 운영원리이고, 세대 고유의 특징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청년세대의 능력주의가 구별되는 지점은 그 ‘농도 내지 강도’가 극단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편의상 그것을 ‘과잉능력주의’(hyper-meritocracy)라 부르기로 하자. 과잉능력주의는 능력자에 대한 우대를 넘어서 무능력자·저능력자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정당화한다. 이 안경으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벌레투성이다. 지역균등제도로 대학을 가면 ‘지균충’, 사법시험을 안 보고 로스쿨을 가면 ‘로퀴’(벌레), 월수입 200만원 이하면 ‘이백충’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과잉능력주의의 일종이다. 부정의를 개선하고 교정하는 대신 (능력자가 되어) ‘초월’하라는 명령인 까닭이다. 능력은 이제 물신이 되고, 더 밀어붙이면 민주주의(democracy)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인민(demos)의 자리를 능력·공로(meritum)가 차지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의 위험을 말하면 많은 이들이 갸웃거린다. “한국 사회에선 연고주의와 정실주의 같은 전근대성 탓에 능력주의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는 게 더 문제 아닌가?” 맞다. 능력주의가 적용되어야 할 많은 영역에 여전히 구태와 구악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과잉능력주의라는 문제도 실재한다. 요컨대 한국에는 능력주의의 ‘과소’와 능력주의의 ‘과잉’이 공존한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양자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공히 ‘더 많은 불평등’을 생산하는 논리라는 점이다. 과잉능력주의, 그것은 평등을 어떻게 달성할지보다 불평등을 어떻게 정당화할지에 지나치게 몰두해온 사회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멸시와 혐오가 곳곳에 넘실대는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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