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이나 ‘성과’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의료 등 공공성이 강한 분야에서 생산성과 수익성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노동자가 직업에 가지는 자부심, 사회적 인정 등은 금전 보상으로 온전히 충족될 수 없으며 실제 공공성을 떠받치는 핵심 요소라는 것. 공동체가 정말 고민하고 합의해야 할 일은 성과연봉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성과연봉제 도입 시도로 은행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철도·지하철노조는 22년 만에 공동파업을 성사시켰다. 의료 부문에까지 성과주의를 적용하려 들면서 노동자들은 물론 시민들 역시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번에도 “귀족노동자” “철밥통” 같은 비난이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정부, 경제신문, 극우신문들은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나태하고 파렴치한 이기주의자로 몰아갔다. 성과주의 신봉자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연공서열제 등등 비성과주의적 제도가 생산성 저하의 결정적 원인이다. 수익이 늘어나면 당근을 주고, 아니면 채찍으로 쳐야 한다.” 이들은 비성과주의 제도들을 전근대적이거나 지대추구적인 구태로 묘사하는 반면, 성과주의 제도를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개혁인 양 포장한다. 과거에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무렵에는 이런 주장이 꽤 잘 먹혔다. 그러나 이젠 예전처럼 통하지 않는다. 왜? 첫 번째 이유는 ‘경험’이다. 저런 단순한 성과주의로 사람을 ‘굴려’봤자 부작용만 크다는 걸 겪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사례가 일본 기업 후지쓰의 경우다. 1993년 성과주의 인사제도를 전격적으로 도입한 이 거대 기업은 이후 10년 동안 충격적으로 몰락하고 만다. 후지쓰 인사부 출신으로 <후지쯔 성과주의 리포트>를 쓴 조 시게유키는 실패 이유가 성과주의 자체에 있다기보다 개인주의에 기반한 미국식 성과주의를 일본 조직에 일방적으로 적용했던 데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성과주의 신봉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거봐라 성과주의는 무죄다. 후지쓰가 적용을 잘못한 것뿐이다.” 그럼 ‘미국식 성과주의를 미국 기업에 적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후지쯔 성과주의 리포트>는 나온 지 벌써 12년이 넘은 책이다. 그사이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2년이 더 흘렀다. 신봉자들에겐 유감스럽게도, 성과주의에 대한 평가는 더욱 박해졌다. ‘원산지’라 할 미국의 유명 기업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 익스피디아, 어도비 시스템 같은 곳이 성과주의 제도를 속속 폐지했다. 이런 흐름은 단지 개별 기업의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좀 거창하게 말해 인류가 이룬 지적 진보 덕택이며, 이것이 바로 성과주의 신봉자들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다. 최근 들어서야 우리는 인간 행동이 단지 유전자에 각인된 생물학적 동기나, 보상과 처벌이라는 경제학적 동기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게 되었다. 미래학자 대니얼 핑크는 동기부여의 문제를 다룬 <드라이브>에서 전자를 “동기 1.0”, 후자를 “동기 2.0”이라 불렀다. 특히 어떤 업무가 흥미롭고 창조적일 경우 금전적 인센티브가 능률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낮춘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바꿔 말하면 성과주의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환경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 놓인 특수한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인간 일반의 본성을 단정하는 태도는, 홉스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사고의 오류다. 알려졌다시피 홉스는 자연 상태의 개인을 악하고 야만적이며 고립된 존재로 규정했다. 사회적 행동을 모두 ‘짝짓기’로 환원해 해석하거나, 경제적 동기로 수렴시켜 서술하는 것 역시 이런 ‘홉스적 오류’(Hobbesian fallacy)의 일종이며, 성과주의가 생산성을 담보한다는 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생산성’이나 ‘성과’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의료 등 공공성이 강한 분야에서 생산성과 수익성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노동자가 직업에 가지는 자부심, 사회적 인정 등은 금전 보상으로 온전히 충족될 수 없으며 그저 주관적 자기만족이 아니라 실제 공공성을 떠받치는 핵심 요소라는 것. 공동체가 정말 고민하고 합의해야 할 일은 성과연봉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어쩌면 기업 인사제도로서 성과주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 깊숙이 내면화되어온 개발 서사로서 성과주의겠다. “해봤어?”와 “하면 된다”와 “빨리빨리”의 성과주의 말이다. 그것이 무엇을 희생시키고 어떤 폐허를 만들었는지를 보라. 자살률 1위, 산재사망률 1위, 출산율 꼴찌(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그리고 세월호다. 우리가 대체 무엇을 위해 성과를 올리고 돈을 벌어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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