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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22 17:52 수정 : 2019.08.22 19:20

박권일
사회비평가

잠시 잊었던 이름, 정유라가 다시 돌아왔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씨의 딸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정유라의 그 유명한 발언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도 다시 소환됐다. 조국씨 딸이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유급을 두 차례 하고도 연속해 장학금을 받은 사실에 대해 “성적도 나쁜데 장학금을 계속 받는 게 말이 되냐”며 분개하는 목소리가 크다고 한다. 동의할 수 없다. 차라리 ‘가정 형편이 나쁘지도 않은데 왜 장학금을 받았느냐’고 했다면 어느 정도 수긍했겠지만 말이다.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영장심사를 받기 위해 2017년 6월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그러나 고교생이 2주 인턴십 후 병리학 논문 제1저자가 된 일은 다른 문제다. 당시 단국대 의대 교수였던 같은 학교 학부형이 주관한 ‘인턴십 프로그램’은 이후 한 번도 운영되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부는 2017년 말부터 교수들이 자녀를 자기 논문 저자로 끼워 넣어온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즉, 오랫동안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논란이 일자 단국대는 사과하고 경위 조사에 들어갔다.

확실히 밝혀 둔다. 조국씨 딸이 정유라씨와 비슷한 부류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성실히 활용한 사람에 가깝다. 모르긴 해도 정씨처럼 불법적 특혜를 적극적으로 누리며 과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국씨도 마찬가지다. 인품으로 보나 업적으로 보나 최순실씨와 비교하는 일 자체가 실례인 인물이다. 현실권력의 ‘핵인싸’이면서도 자기 행보를 ‘앙가주망’(기득권을 내려놓고 사회변혁에 투신하는 행위)이라 표현한 최근 발언이 비록 실소를 자아내긴 했지만, 그의 삶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기득권 스테레오타입과 똑같다고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논란은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조국씨가 장관이 되느냐 여부는 차라리 부차적이다. 이른바 ‘강남좌파’의 위선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이 사건은 기득권층과 다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놓인 벽이 단지 돈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적나라하게 보여줬기에 문제적이다. 이를테면 대다수 부모가 자녀 학원비와 스펙 쌓기에 들어가는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어떤 학부모는 자기 자식만을 위한 최상급 스펙을 뚝딱 만들어줄 수 있었다는 사실. 물론 이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기득권층은 경제자본만이 아니라 교양·취향 등의 문화자본, 인맥 등의 사회자본에서 서민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그런 부조리함에 분노한다. 그러면서 크게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하나는 사법시험 같은 일제시험으로 줄 세우는 게 역시 가장 “공정”하다면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양한 ‘스펙’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방향 자체는 맞으니까 부모의 불법·편법적 개입만 잘 단속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양자 모두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지금까지 한국 공교육이 실패한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입시경쟁 체제 아래서 부모의 전략적 개입을 막는다는 게 애당초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일제고사 형식이든 수시 형식이든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부모의 상징자본이 풍족한 쪽이 무조건 승리한다. 더 치명적인 건 설령 부모가 의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스펙’이나 능력이라 부르는 요소가 이미 경쟁이 무의미할 정도로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처럼 “능력이나 재능 자체는 시간과 문화자본이 투여된 산물”인 까닭이다.

어찌해야 할까. 한국 사회는 해결은 고사하고 아직 문제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입에 올리는 ‘공정성’이란 단어 자체를 문제화해보는 시도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예컨대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거다. ‘흙수저들은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에 몰두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그토록 공감하는 사람들이 왜 장학금은 성적순으로 줘야 “공정”하다 여기는가? 형편이 가장 못한 이에게 가장 많은 기회와 자원을 제공하는 것은 “특혜”인가, “공정함”인가? 이런 물음들을 통해 우리는 지금 ‘공정성’이란 기준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또 진정한 공정성은 무엇인지 숙고해볼 수 있다. 분명한 건 초기값의 차이가 너무 큰 결과값 차이로 이어지는 공동체에는 미래가 없다는 점이다. 정유라는 바로 그런 곳에 영원 회귀하며 냉소와 환멸만 전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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