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과학’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칭송하고 재연하려 하지 말고, 그 일을 누가 어떤 조건에서 하고 있는지, 또 그 일을 할 기회가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지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의 과학’은 경제효과를 유일한 가치로 삼지 않고,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과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요즘 한국에는 과학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자면 ‘아무나의 과학’과 ‘누군가의 과학’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지배적이었던 ‘아무나의 과학’을 답답하게 느낀 과학자들이 조금씩 ‘누군가의 과학’을 말하기 시작하고 있다. ‘아무나의 과학’이란 좋은 결과를 내기만 한다면 그 일을 누가 어떻게 하든지 신경 쓰지 않는 과학이다.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내고 노벨상을 받고,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만들기만 한다면 아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유일한 조건은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이다. 과학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이득을 가져다줄 한국인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옛날 말로는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고, 조금 지난 말로는 ‘창조경제’를 선도하고, 요즘 말로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할 뿐 어떤 한국인이 어떻게 그 일을 하고 사는지는 묻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무나의 과학’은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정치적으로 무해한 과학이다. 국가가 선호하는 과학이다. 국가는 명석한 두뇌와 성실한 태도를 갖춘 과학자를 대표 선수로 삼아 국제 경기에 출전시키는 것처럼 과학을 운영했다. 대표 선수를 빼고는 이름 없는 과학자로 남았다. 이런 과학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일한 최형섭 박사의 회고록 제목이기도 한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였다. 과학자는 여기에 기꺼이 부름을 받아 밤낮없이 연구를 했다. ‘아무나의 과학’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나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누구든지 환영하고 존중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국가가 주도하는 ‘아무나의 과학’은 경력 단절이 두려운 여성 과학자나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 청년 과학자의 사정을 꼼꼼히 챙길 수 없었다. 그러려면 과학자가 연구실 밖에서 살아내야 할 삶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과학’은 바로 과학이 누군가의 삶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과학은 국가가 그 결과를 거두어가면 끝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연의 탐구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다. 동시에 과학은 누군가의 소중한 생계수단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과학’은 과학자들의 현실을 살피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2월2일 카이스트에서 열린 ‘과학기술계 합리적 질서 논한다’라는 제목의 토론회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는 표현을 두고 참가자들의 견해가 엇갈린 것은 결국 과학을 보는 시각 차이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과학’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칭송하고 재연하려 하지 말고, 그 일을 누가 어떤 조건에서 하고 있는지, 또 그 일을 할 기회가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지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출판된 <소년소녀, 과학하라!>, <과학하는 여자들> 같은 책은 제목에서부터 누가 하는 과학인지를 밝혀두고 있다. 소년만이 아니라 소녀도 과학에 흥미를 느끼기를 권하고, 또 과학자로 살아가는 여자라는 정체성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누군가의 과학’을 드러내는 이 책들이 ‘과학하다’라는 조금 낯선 동사를 내세운 것도 눈에 띈다. ‘아무나의 과학’이 결과를 가리키는 명사로 존재한다면 ‘누군가의 과학’은 과정을 가리키는 동사로 존재한다.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이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여 발간한 <어떤 대화: 청년 과학기술인의 목소리>에는 ‘과학하다’라는 동사의 예문이 될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연구실 불을 끄지 않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개인의 고충과 제도의 문제도 담겨 있다. ‘아무나의 과학’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과학이었다면, ‘누군가의 과학’은 과학하는 사람들의 현재를 살펴서 미래를 열어가려는 과학이다. ‘누군가의 과학’은 경제효과를 유일한 가치로 삼지 않고,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과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여성, 청년, 성소수자, 장애인, 이민자 등 과학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조건을 존중하고 그들의 과학과 삶이 모두 풍성해지도록 애쓴다. 다 좋은 얘기지만 그것이 과학 본연의 일은 아니라고 지적할 사람도 있겠다. 그런다고 반드시 과학이 더 발전하겠느냐는 의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과학’은 바로 과학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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