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주말마다 방학마다 체험 행사가 넘쳐난다. 아이들은 쾌적한 분위기의 실내 동물원에서 동물을 만지고 먹이를 주는 ‘동물체험’을 한다. “의사 직업 체험전”에 가면 하얀 가운을 입고 주사기를 써볼 수 있다. 국방부가 연 “우리 국군 체험전”에서는 “입체 포토존에서 어린이 군복 체험”을 하고 “온몸으로 느끼는 대한민국 체험”을 했다. 체험은 생산자에게는 홍보와 돈벌이 수단이 되고, 소비자에게는 교육의 연장이자 주말 나들이 거리가 된다. 이런 필요와 전략이 맞물려 ‘체험산업’이 번성한다. 사회학자 게르하르트 슐체가 제시한 ‘체험사회’라는 이름은 한국에도 잘 들어맞는다. 정치인도 아이들 못지않게 체험을 즐긴다. 유력 정치인의 이름에 ‘체험’이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하면 ‘체험정치’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집배원 체험, 실버택배 체험, 콜센터 체험, 모바일 혈액진단기 체험, 모션캡처 체험, 조류인플루엔자 방역 체험 등 이른바 민생의 현장이나 혁신의 현장을 찾음으로써 본인이 이 사회의 일반적 삶과 동떨어진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한국방송공사에서 20년 가까이 방영하다 2012년에 끝난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의 취지를 정치인들이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아이와 정치인은 과연 무엇을 체험하는가? 체험을 제공하는 이들은 다양한 직업의 현장과 삶의 실상, 즉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홍보한다. 직접 겪지 못하는 현실을 잠시나마 체험함으로써 미래에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은 체험하는 사람의 필요와 여건에 맞추어 미리 짜놓은 현실, 치밀하게 계산된 현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상현실’이다. 아이와 정치인의 처지를 고려해서 눈앞에 보일 만한 것, 손에 닿을 만한 것,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는 것을 잘 계산해서 마련해 놓은 맞춤형 가상현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 손에 닿지 않는 제도, 장시간 반복되는 일상은 일회용 체험 행사에서 제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가상현실의 ‘체험’으로 현실의 ‘경험’을 갈음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경험과 체험의 차이다. <투명사회>를 쓴 철학자 한병철은 “경험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체험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타자로 가득한 현실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변화하는 동시에 현실을 변화시킬 동력을 얻는다. 이와 달리 가상현실은 그것을 체험하고 있는 자신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며, 잠시 맛본 현실에 순응하거나 무심코 현실을 좇아가도록 이끈다. 경험 대신 체험을 제공하는 가상현실은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흐릴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흐리기도 한다. 요즘 미래 기술로 각광받는 디지털 가상현실(VR) 기술은 경험을 체험으로 대체하려는 오랜 시도의 결정판이다. 두 눈 위로 장치 하나만 두르면 3차원으로 재현된 세계가 바로 앞에 펼쳐진다. 한층 빠르고 정교한 계산으로 구현한 가상현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는 본격 체험사회를 예고하는 것만 같다.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정치인들은 이미 가상현실 기술 체험에 나섰다. 원래 각종 체험에 익숙한 이들이지만, 체험하는 기술을 또 체험하는 모습은 이중으로 어색하다. 두 눈을 덮고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면서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도 재임 중 여러 차례 가상현실 기기 전시장을 찾았다. 가상현실 장치를 착용한 대통령을 찍은 보도사진 속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등장하고, 조윤선 장관과 안종범 수석도 보인다. 가장 최근인 2016년 10월7일 ‘첨단 VR 전시물을 둘러본 박 대통령은 “이렇게 하다가 실제 생활에서 가상현실이 넓어지고 현실 세계는 좁아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며 웃음을 지었다’(연합뉴스)고 한다. 누군가 계산하여 마련해준 드넓은 가상현실 속에서 그는 대통령 체험을 했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자신의 모습을 계속 확인했을 뿐,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이 세계의 현실을 대면하지도 못한, 혼자만의 체험이었다. 그의 가상 대통령 체험이 곧 끝난다. 이제부터 펼쳐질 현실은 온전히 우리가 경험할 몫이다.
칼럼 |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가상현실과 체험사회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주말마다 방학마다 체험 행사가 넘쳐난다. 아이들은 쾌적한 분위기의 실내 동물원에서 동물을 만지고 먹이를 주는 ‘동물체험’을 한다. “의사 직업 체험전”에 가면 하얀 가운을 입고 주사기를 써볼 수 있다. 국방부가 연 “우리 국군 체험전”에서는 “입체 포토존에서 어린이 군복 체험”을 하고 “온몸으로 느끼는 대한민국 체험”을 했다. 체험은 생산자에게는 홍보와 돈벌이 수단이 되고, 소비자에게는 교육의 연장이자 주말 나들이 거리가 된다. 이런 필요와 전략이 맞물려 ‘체험산업’이 번성한다. 사회학자 게르하르트 슐체가 제시한 ‘체험사회’라는 이름은 한국에도 잘 들어맞는다. 정치인도 아이들 못지않게 체험을 즐긴다. 유력 정치인의 이름에 ‘체험’이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하면 ‘체험정치’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집배원 체험, 실버택배 체험, 콜센터 체험, 모바일 혈액진단기 체험, 모션캡처 체험, 조류인플루엔자 방역 체험 등 이른바 민생의 현장이나 혁신의 현장을 찾음으로써 본인이 이 사회의 일반적 삶과 동떨어진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한국방송공사에서 20년 가까이 방영하다 2012년에 끝난 <체험 삶의 현장> 프로그램의 취지를 정치인들이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아이와 정치인은 과연 무엇을 체험하는가? 체험을 제공하는 이들은 다양한 직업의 현장과 삶의 실상, 즉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홍보한다. 직접 겪지 못하는 현실을 잠시나마 체험함으로써 미래에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은 체험하는 사람의 필요와 여건에 맞추어 미리 짜놓은 현실, 치밀하게 계산된 현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상현실’이다. 아이와 정치인의 처지를 고려해서 눈앞에 보일 만한 것, 손에 닿을 만한 것,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는 것을 잘 계산해서 마련해 놓은 맞춤형 가상현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 손에 닿지 않는 제도, 장시간 반복되는 일상은 일회용 체험 행사에서 제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가상현실의 ‘체험’으로 현실의 ‘경험’을 갈음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경험과 체험의 차이다. <투명사회>를 쓴 철학자 한병철은 “경험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체험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타자로 가득한 현실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변화하는 동시에 현실을 변화시킬 동력을 얻는다. 이와 달리 가상현실은 그것을 체험하고 있는 자신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며, 잠시 맛본 현실에 순응하거나 무심코 현실을 좇아가도록 이끈다. 경험 대신 체험을 제공하는 가상현실은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흐릴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흐리기도 한다. 요즘 미래 기술로 각광받는 디지털 가상현실(VR) 기술은 경험을 체험으로 대체하려는 오랜 시도의 결정판이다. 두 눈 위로 장치 하나만 두르면 3차원으로 재현된 세계가 바로 앞에 펼쳐진다. 한층 빠르고 정교한 계산으로 구현한 가상현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는 본격 체험사회를 예고하는 것만 같다.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정치인들은 이미 가상현실 기술 체험에 나섰다. 원래 각종 체험에 익숙한 이들이지만, 체험하는 기술을 또 체험하는 모습은 이중으로 어색하다. 두 눈을 덮고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면서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도 재임 중 여러 차례 가상현실 기기 전시장을 찾았다. 가상현실 장치를 착용한 대통령을 찍은 보도사진 속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등장하고, 조윤선 장관과 안종범 수석도 보인다. 가장 최근인 2016년 10월7일 ‘첨단 VR 전시물을 둘러본 박 대통령은 “이렇게 하다가 실제 생활에서 가상현실이 넓어지고 현실 세계는 좁아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며 웃음을 지었다’(연합뉴스)고 한다. 누군가 계산하여 마련해준 드넓은 가상현실 속에서 그는 대통령 체험을 했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자신의 모습을 계속 확인했을 뿐,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이 세계의 현실을 대면하지도 못한, 혼자만의 체험이었다. 그의 가상 대통령 체험이 곧 끝난다. 이제부터 펼쳐질 현실은 온전히 우리가 경험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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