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과학의 날’ 다음날이면서 ‘지구의 날’이었던 4월22일 토요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 한켠에 모인 과학자들이 팻말을 들고 연설을 하고 구호를 외쳤다. ‘함께하는 과학행진’에 참가한 이들은 여성 과학자, 장애인 과학자의 삶을 말하고, 과학기술 분야 진로 상담을 해주고, 간단한 실험을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했다. 시민을 향해서는 “과학과 대중은 하나다”라는 구호가, 정부를 향해서는 “연구는 자율적으로, 국정운영은 과학적으로”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대통령 선거를 두 주 남짓 앞두고서 선명한 정치색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과학자들이 광화문에서 구호를 외치고 광장 둘레를 한 바퀴 행진한 것 자체가 한국 과학계에는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행사는 대체로 밝은 분위기였지만, 과학자들이 그저 과학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광화문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 서울의 과학행진은 미국 과학자들의 제안에 세계 500여 곳의 과학자들이 호응하여 기획한 국제적 행사의 일부였다. 수십 년간 쌓인 기후 변화의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고 과학과 환경 분야의 조직과 예산을 줄이려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방침에 항의하는 뜻을 담았다.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것을 과학의 미덕으로 여기던 많은 과학자들이 이번에는 “침묵 대신 과학을”이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백악관이라는 세계 정치의 한복판에서 과학이 그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연설을 마친 과학자들이 광화문 광장 둘레를 행진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곧 한국 사회에서 위협받거나 부정당하고 있는 존재들을 목격했다. 과학자의 행진은 ‘최저임금 1만원 국민발안 서명’을 받는 곳을 지나, 고공 단식농성 9일 차인 해고노동자들과 마주쳤고, 횡단보도를 건너 세월호 천막 옆을 통과했다. 곧이어 ‘청소노동자의 봄’ 행진을 준비하는 무대가 나타났고, 그 뒤로는 “걱정 마, 지구야”라는 말을 내건 ‘지구의 날’ 기념행사장이 있었다.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그날 광화문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 가치를 지키려 했다. 광장에는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 여성이 있는 민주주의, 지구가 있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넘쳤고, 과학자들은 ‘과학이 있는 민주주의’라는 요구를 추가한 셈이었다. 다만 선거라는 바람을 타고 이 목소리들이 어디까지 당도할지는 알 수 없었다. 선거와 과학의 공통점은 지금껏 보이지 않던 존재,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고, 그 존재가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규명하고, 가능하다면 그 목소리를 듣고, 그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실험실 안과 밖에서 유용하든 무용하든, 영원하든 일시적이든, 온갖 존재들을 찾아내고 그 성질을 탐구해 왔다. 목성, 중성자, 그래핀, 티라노사우루스, 호모 사피엔스 같은 존재들이 그렇게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수많은 존재를 감지하고, 이해하고, 변형하고, 심지어는 만들어냄으로써 과학의 존재 의의를 어렵지 않게 증명해 왔다. 그러던 과학이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만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과학과 민주주의의 동시 위기라고 부를 만하다. 위기의 조짐은 한국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약한 존재, 억눌린 존재를 찾아내고 살펴야 할 대통령 선거 기간에 터져 나온 동성애 혐오가 그런 사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은 동성애자가 치료나 교정이 필요한 비정상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어떤 성적 지향이 있는 온당한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임을 밝혀 왔다. 그 존재는 부정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므로 동성애 혐오는 한 인간의 온당함을 폄훼하는 동시에 그 온당함을 믿을 만한 ‘사실’로 확립해 온 과학을 부정하는 일이다. 반인권적이면서 반과학적이다.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힘센 이들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기후 변화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한다는 점에서 지구와 성소수자와 과학은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트럼프의 미국과 동성애 혐오의 한국에서 과학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밝혀낸 존재들을 함께 지켜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는 곧 과학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지키는 일이다.
칼럼 |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과학 지키기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과학의 날’ 다음날이면서 ‘지구의 날’이었던 4월22일 토요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 한켠에 모인 과학자들이 팻말을 들고 연설을 하고 구호를 외쳤다. ‘함께하는 과학행진’에 참가한 이들은 여성 과학자, 장애인 과학자의 삶을 말하고, 과학기술 분야 진로 상담을 해주고, 간단한 실험을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했다. 시민을 향해서는 “과학과 대중은 하나다”라는 구호가, 정부를 향해서는 “연구는 자율적으로, 국정운영은 과학적으로”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대통령 선거를 두 주 남짓 앞두고서 선명한 정치색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과학자들이 광화문에서 구호를 외치고 광장 둘레를 한 바퀴 행진한 것 자체가 한국 과학계에는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행사는 대체로 밝은 분위기였지만, 과학자들이 그저 과학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광화문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 서울의 과학행진은 미국 과학자들의 제안에 세계 500여 곳의 과학자들이 호응하여 기획한 국제적 행사의 일부였다. 수십 년간 쌓인 기후 변화의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고 과학과 환경 분야의 조직과 예산을 줄이려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방침에 항의하는 뜻을 담았다.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것을 과학의 미덕으로 여기던 많은 과학자들이 이번에는 “침묵 대신 과학을”이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백악관이라는 세계 정치의 한복판에서 과학이 그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연설을 마친 과학자들이 광화문 광장 둘레를 행진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곧 한국 사회에서 위협받거나 부정당하고 있는 존재들을 목격했다. 과학자의 행진은 ‘최저임금 1만원 국민발안 서명’을 받는 곳을 지나, 고공 단식농성 9일 차인 해고노동자들과 마주쳤고, 횡단보도를 건너 세월호 천막 옆을 통과했다. 곧이어 ‘청소노동자의 봄’ 행진을 준비하는 무대가 나타났고, 그 뒤로는 “걱정 마, 지구야”라는 말을 내건 ‘지구의 날’ 기념행사장이 있었다.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그날 광화문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 가치를 지키려 했다. 광장에는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 여성이 있는 민주주의, 지구가 있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넘쳤고, 과학자들은 ‘과학이 있는 민주주의’라는 요구를 추가한 셈이었다. 다만 선거라는 바람을 타고 이 목소리들이 어디까지 당도할지는 알 수 없었다. 선거와 과학의 공통점은 지금껏 보이지 않던 존재,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고, 그 존재가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규명하고, 가능하다면 그 목소리를 듣고, 그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실험실 안과 밖에서 유용하든 무용하든, 영원하든 일시적이든, 온갖 존재들을 찾아내고 그 성질을 탐구해 왔다. 목성, 중성자, 그래핀, 티라노사우루스, 호모 사피엔스 같은 존재들이 그렇게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수많은 존재를 감지하고, 이해하고, 변형하고, 심지어는 만들어냄으로써 과학의 존재 의의를 어렵지 않게 증명해 왔다. 그러던 과학이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만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과학과 민주주의의 동시 위기라고 부를 만하다. 위기의 조짐은 한국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약한 존재, 억눌린 존재를 찾아내고 살펴야 할 대통령 선거 기간에 터져 나온 동성애 혐오가 그런 사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과학은 동성애자가 치료나 교정이 필요한 비정상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어떤 성적 지향이 있는 온당한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임을 밝혀 왔다. 그 존재는 부정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므로 동성애 혐오는 한 인간의 온당함을 폄훼하는 동시에 그 온당함을 믿을 만한 ‘사실’로 확립해 온 과학을 부정하는 일이다. 반인권적이면서 반과학적이다.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힘센 이들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기후 변화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한다는 점에서 지구와 성소수자와 과학은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트럼프의 미국과 동성애 혐오의 한국에서 과학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밝혀낸 존재들을 함께 지켜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는 곧 과학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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