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2017년 판사들에 대한 사찰을 거부하며 사표를 냄으로써 ‘사법농단’ 사태를 처음 세상에 알린 이탄희 전 판사는, 지난달 15일 방송된 <한국방송>(KBS) ‘거리의 만찬’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사법개혁의 처음이자 끝은 사실 판사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거거든요”라고 말했다. 그가 지난 2월말 두번째 사표를 내고 법원을 떠나면서 “내가 누군지 아는 판사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 1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쓴 것과 통하는 말이었다. 제작진이 준비한 사법농단 피해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본 그는 “내가 내 일을 제대로 안 할 때 어떤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받는가”를 목격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이탄희 전 판사는 소방관의 예를 들었다. “소방관이 직무 태만해서 불 끄러 안 나가서 사람들 죽고 건물도 무너지고, 그 모습을 보고 나면 아 소방관이 무슨 일을 하는 거구나, 내가 누군가 알 수 있잖아요.” 판사든 소방관이든 타인의 삶을 구할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말이었다. 지난 4일 저녁 강원도 고성의 야산에서 시작해서 속초 시내 쪽으로 빠르게 번지던 산불 앞에서 전국의 소방관들과 산림청 산불재난 특수진화대원들은 바로 그 질문과 또다시 대면했다. 강원도를 향해 고속도로를 줄지어 달려가는 소방차 안에서, 불을 피해 빠져나오는 시민들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불길이 다가오고 있는 엘피지(LPG) 충전소 앞을 지키면서, 밤새 마스크가 새카맣게 되도록 산불과 씨름하면서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물었고, 행동으로 대답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국가가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잊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속초의료원에서는 영랑호를 건너 병원으로 접근하는 불길을 피해 원장과 의료진과 직원들이 힘을 합쳐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구급차에 태우고, 직원들 차에도 태워 안전한 곳으로 이송했다. 그러느라 밤새 자기 집이 불에 타버린 것도 몰랐던 팀장은 다시 출근해서 어질러진 의료원을 정리하고 환자들을 맞을 채비를 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잊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날 강원도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있었다. 산불이 난 밤, 고성 지역으로 수학여행을 와 있던 경기도 평택의 중학교 교감 선생님은 장기자랑을 즐기고 있던 학생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지금부터 선생님과 안전요원들의 지시에 따라주기 바란다.” 산불이 학생들이 있던 리조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탈출하라”는 지시를 받은 학생들은 버스 일곱대에 나눠 타고 불을 피해 달렸다. 그중 한대에 불꽃이 튀고 연기가 나자 수동으로 문을 열고 가까스로 버스를 탈출했다. 불길에 휩싸인 버스를 뒤로하고 다시 길에 오른 교사와 학생들은 새벽 무렵 평택의 학교에 무사히 도착했다.(<한겨레> 보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행동했던 사람들 덕분에 학생들은 4월에 떠난 수학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14년 4월17일 춘천의 어느 카페는 빨간색 입간판에 하얀색으로 이런 글을 적어 문 앞에 두었다. “살릴 수 있었다. 무전기는 왜 개발했고 헬기는 왜 만들었나. 배는 왜 만들고 언론은 왜 존재하나. … 아이들은 배가 기우는 중에도 믿고 있었다. 당신들을. 지금도 어둠 속에서 믿고 있을 거다. 제발 무사하길, 아프지 않길.” 무전기, 헬기, 엘리베이터, 소방차, 구급차, 버스는 왜 만들었는지 이번 4월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 결국 사람을 살린 것은 자기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화재 현장에서, 병원에서, 학교에서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듯 살아온 직업인이자 생활인들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 해야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 믿고 있는 이들을 배반하지 않은 사람들 덕분에 이번 4월에는 구할 수 있었다.
칼럼 |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4월에 구하다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2017년 판사들에 대한 사찰을 거부하며 사표를 냄으로써 ‘사법농단’ 사태를 처음 세상에 알린 이탄희 전 판사는, 지난달 15일 방송된 <한국방송>(KBS) ‘거리의 만찬’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사법개혁의 처음이자 끝은 사실 판사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거거든요”라고 말했다. 그가 지난 2월말 두번째 사표를 내고 법원을 떠나면서 “내가 누군지 아는 판사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 1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쓴 것과 통하는 말이었다. 제작진이 준비한 사법농단 피해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본 그는 “내가 내 일을 제대로 안 할 때 어떤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받는가”를 목격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이탄희 전 판사는 소방관의 예를 들었다. “소방관이 직무 태만해서 불 끄러 안 나가서 사람들 죽고 건물도 무너지고, 그 모습을 보고 나면 아 소방관이 무슨 일을 하는 거구나, 내가 누군가 알 수 있잖아요.” 판사든 소방관이든 타인의 삶을 구할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말이었다. 지난 4일 저녁 강원도 고성의 야산에서 시작해서 속초 시내 쪽으로 빠르게 번지던 산불 앞에서 전국의 소방관들과 산림청 산불재난 특수진화대원들은 바로 그 질문과 또다시 대면했다. 강원도를 향해 고속도로를 줄지어 달려가는 소방차 안에서, 불을 피해 빠져나오는 시민들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불길이 다가오고 있는 엘피지(LPG) 충전소 앞을 지키면서, 밤새 마스크가 새카맣게 되도록 산불과 씨름하면서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물었고, 행동으로 대답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국가가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잊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속초의료원에서는 영랑호를 건너 병원으로 접근하는 불길을 피해 원장과 의료진과 직원들이 힘을 합쳐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구급차에 태우고, 직원들 차에도 태워 안전한 곳으로 이송했다. 그러느라 밤새 자기 집이 불에 타버린 것도 몰랐던 팀장은 다시 출근해서 어질러진 의료원을 정리하고 환자들을 맞을 채비를 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잊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날 강원도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있었다. 산불이 난 밤, 고성 지역으로 수학여행을 와 있던 경기도 평택의 중학교 교감 선생님은 장기자랑을 즐기고 있던 학생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지금부터 선생님과 안전요원들의 지시에 따라주기 바란다.” 산불이 학생들이 있던 리조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탈출하라”는 지시를 받은 학생들은 버스 일곱대에 나눠 타고 불을 피해 달렸다. 그중 한대에 불꽃이 튀고 연기가 나자 수동으로 문을 열고 가까스로 버스를 탈출했다. 불길에 휩싸인 버스를 뒤로하고 다시 길에 오른 교사와 학생들은 새벽 무렵 평택의 학교에 무사히 도착했다.(<한겨레> 보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행동했던 사람들 덕분에 학생들은 4월에 떠난 수학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14년 4월17일 춘천의 어느 카페는 빨간색 입간판에 하얀색으로 이런 글을 적어 문 앞에 두었다. “살릴 수 있었다. 무전기는 왜 개발했고 헬기는 왜 만들었나. 배는 왜 만들고 언론은 왜 존재하나. … 아이들은 배가 기우는 중에도 믿고 있었다. 당신들을. 지금도 어둠 속에서 믿고 있을 거다. 제발 무사하길, 아프지 않길.” 무전기, 헬기, 엘리베이터, 소방차, 구급차, 버스는 왜 만들었는지 이번 4월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 결국 사람을 살린 것은 자기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화재 현장에서, 병원에서, 학교에서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듯 살아온 직업인이자 생활인들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 해야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 믿고 있는 이들을 배반하지 않은 사람들 덕분에 이번 4월에는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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