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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05 11:05 수정 : 2017.04.07 15:41

㈔한국독립동지회 정찬준 회장이 3·1절 98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독립동지회 사무실에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문제 등을 얘기하고 있다. 항일 독립투사 170여명이 모여 1952년에 설립한 독립동지회는 가장 오래된 독립운동 관련 민간단체다.

[토요판] 인터뷰
한국독립동지회 정찬준 회장

㈔한국독립동지회 정찬준 회장이 3·1절 98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독립동지회 사무실에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문제 등을 얘기하고 있다. 항일 독립투사 170여명이 모여 1952년에 설립한 독립동지회는 가장 오래된 독립운동 관련 민간단체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을 기리고 예우하는 것은 국가 유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운 이들은 많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 사회는 제대로 받들고 있을까요? 3·1절 98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관련단체 중 가장 오래된 ‘한국독립동지회’의 정찬준(86) 회장을 만났습니다.

손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이 별 쓸모가 없었다. 인터넷 홈페이지도 없고, 지도에도 위치가 나오지 않는 탓이다. 고성능 휴대전화는 오로지 서로 위치를 묻고 답하는 데 쓰였다. 탑골공원 근처 골목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몇차례 통화를 한 뒤에야 서울 종로구 수표로22길에 위치한 ‘사단법인 한국독립동지회’(이하 독립동지회)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 3층에 있는 사무실 내부 모습도 낙원동 동네만큼이나 오랫동안 시간이 멈춰 있는 듯했다.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책상 네댓개와 소파를 벽면의 빛바랜 액자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에서 늘어뜨린 줄을 당겨서 불을 켜고 끄는 형광등은 정겹기까지 했다. 1920년대 후반에 결성된 범민족적 항일단체인 신간회의 서울지부가 있던 자리라는 설명에 모든 것이 오히려 잘 어울려 보였다. 정찬준 회장과의 인터뷰에는 순수 자원봉사로 사무실을 지키는 윤재희(76) 상임부회장과 임통일(62) 기획실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1952년 설립된 독립동지회
관련단체 중 가장 오랜 역사
독재정권 맞선 민간단체
정부 후원 없이 자율적 운영

독립유공자 유족 연금
후손 중 1명에게만 지급
“국정교과서 헌법정신 외면
독립운동가 자존심에 상처”

-한국독립동지회는 언제 만들어졌나?

“해방된 지 7년 뒤인 1952년에 일제 때 독립운동했던 분들이 모여서 결성했다. 애국동지원호회로 출발해서 이후 애국동지회, 한국독립동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올해가 창립 65년이다. 비록 사무실이 허술해도 유서가 깊은 단체다.”

정 회장 자비로 65년 명맥 유지

독립동지회는 이규갑, 문일민, 김승학, 김재호, 안재환 등 항일 독립투사들이 중심이 돼 1952년 3월 결성됐다. 17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초대 회장은 이규갑(1888~1970) 선생이 맡았다.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규갑은 구한말 항일의병활동을 했고, 1910년 한일합병 뒤에는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규갑의 부인 이애라도 3·1 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그 후유증으로 1921년에 숨졌다. 애국동지원호회는 광복 이후 독립운동을 정리한 최초의 역사책인 <한국독립운동사>를 1956년에 펴냈다. 집필자인 김승학(1881~1965) 역시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투쟁에 헌신했다.

-독립운동 관련 단체라고 하면 보통 광복회가 떠오른다. 광복회와는 어떤 관계인가?

“조직상의 관계는 없다. 광복회는 1965년 정부가 주도해서 만들었다. 보훈처의 산하기관으로, 국가의 예산을 사용하는 관영 단체다. 반면에 독립동지회는 독립투쟁을 한 당사자들이 중심이 돼서 만든 자율적인 민간단체다. 광복 관련 민간단체로는 ‘한국광복군동지회’와 ‘독립유공자협회’, ‘민족대표33인유족회’, ‘순국선열유족회’ 등 여러 개가 있지만, 독립동지회가 그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회원 중에 생존한 애국지사들이 몇분이나 되나?

“고문 몇분이 계시지만, 거의 95세 전후로 연세가 많아서 거동을 못하신다. 그래서 독립동지회도 지금은 2세나 3세 등 유가족이 중심이다.”

-2세로는 정 회장이 처음으로 대표가 된 것으로 안다.

“부친(정우채)께서 독립운동을 하셔서 독립동지회 활동을 후원하는 등 오래전부터 순수한 회원으로만 참여해왔다. 7년 전(2010년) 총회에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회원들이 나한테 회장을 맡겼다. 본래 나서길 좋아하질 않는데, 어려움에 처한 단체를 외면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지금까지 이러고 있다.”

㈔한국독립동지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정찬준 회장(가운데)과 윤재희 상임부회장(왼쪽), 임통일 기획실장(오른쪽)이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부 지원이 일체 없어 회비로 운영비를 감당해왔지만, 생존 애국지사가 줄어들면서 회비마저 끊긴 상태였다. 이에 평소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던 정 회장에게 요청한 것이다. 사무실 임대료 등 운영비는 정 회장이 전적으로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국영기업체였던 호남비료에 입사해 1980년대 초까지 일했고, 이후 개인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전남 나주 태생인 부친 정우채(1911~1989) 선생은 광주고보 1학년 때인 1926년 광주지역 학생들의 항일결사단체인 성진회에 가담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명이었다. 이 일로 수감생활을 하는 등 일제시대 두차례 투옥됐다.

국립묘지 서열에서도 밀리는 독립투사

-국가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임통일 기획실장) “독립동지회는 독립투사들이 스스로 만들었기에 정신이 상당히 강하다. 남북통일을 지향하고, 독재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전두환 정권이 호헌을 추진했을 때 광복회는 찬성했지만, 우리 독립동지회는 반대했을 정도로 독재와는 상극이다. 그런 전통과 정신이 있는 곳이기에 정부에서 지원을 하겠다고 했더라도 어른들이 거부했을 것이다.”

(윤재희 상임부회장) “과거에 정보기관에서 국정에 협조하면 지원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이를 거부한 적도 있다.”

-1945년 광복이 있기까지 많은 분들의 항일투쟁이 있었다. 투쟁의 결과로 광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일제에 맞선 항거가 없었더라면 이후 떳떳한 국가를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나 우리 사회가 독립투사들을 제대로 예우해야 한다. 유공자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적 대우가 어떤가?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지금 독립유공자 연금 문제가 심각하다. 독립투쟁 하느라 가족을 보살피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유공자 후손들이 거의가 어렵게 살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유족 가운데 1명에게만 연금을 주고 있다. 과거 나라가 못살 때 우선 1명만 주겠다고 한 것인데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넘었는데도 그대로인 것은 말이 안 된다. 독립투사들의 노고를 우리 사회가 존중한다면 액수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그 자손들에게는 전부 혜택을 줘야 한다. 이북만 해도 액수는 적을지언정 자손 전부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고 한다.” (임통일 실장) “저는 할아버지가 독립투쟁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 형제 네 분이 공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손자대까지 합하면 할아버지 후손이 20명인데 그중에 1명만 연금을 받고 있다. 회원들 중에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있다. 자손들이 할아버지가 왜 독립운동을 해서 우리를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냐고 따진다면 그게 바로 된 사회냐?”

-연금 외에 다른 문제는 없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회적 인식 개선이다. 그런데 지금 국립묘지에 가도 독립유공자 묘역이 국군장병보다 아래에 있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독립영웅에 대한 처우가 국군병사들 밑에 자리하는 건 아니지 않나. 묘지뿐 아니라 모든 것이 지금 그런 식이다. 광복의 빛을 밝힌 분들이 독립운동한 분들인데, 그분들의 정신을 제대로 받들지 않고 어떻게 국민통합과 문화국가, 민족통일을 이룩하겠나. 독립운동한 사람들한테 자긍심을 심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대통령 맘대로 교과서 쓰면 국가도 아냐”

-국정교과서도 독립유공자들의 자존심을 긁는 문제일 텐데.

“명색이 국가 지도자라는 사람이 (임시정부를 승계한다는) 헌법 정신을 등지고 그런 편가르기에 매몰돼서 이렇게 옹색하게 (국정교과서를 추진)할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윤재희 부회장) “국정교과서도 너무나 우리 사회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썼고, 해방 뒤 48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장에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표현했는데도 그것을 대한민국 국가 수립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역사의식이 없이 대통령 개인 생각에 맞춰 교과서 내용이 달라진다면 그건 국가도 아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도 독립정신과는 크게 어긋나 보인다. “그거야 이를 데 있나. 나라가 혼란하고 어지러운 틈에 (국민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내용을 조약이라고 맺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국민들의 앞길에 크나큰 바윗덩어리를 가져다가 가로막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윤재희 부회장)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도 우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을 안 한다고 나라가 무너지나. 국민의 동의를 받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감정을 너무 무시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제로 몇달째 정국이 혼란스럽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우리는 정치와 무관한 단체이긴 한데 지금까지 전개돼온 상황은 시대정신에 심히 어긋났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 안전은 미국에, 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따라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협력을 강화하되 종속적인 의존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나가야 한다. 편가르기 말고 국가의 중심을 잘 잡았어야 한다. 올해가 3·1절 98주년이다. 3·1 독립투쟁은 신분이나 종교, 이념을 떠나 민족이 혼연일체가 됐다. 다시 한번 3·1 정신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해 뜰 시간도 가깝다. 나라가 어렵더라도 대동단결해서 극복해 나가야 한다.”

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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