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 두 건축가의 놀이터 실험
좋은 ‘아빠 건축가’ 되고 싶어
놀이터 만들기 나선 서민우·지정우씨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세상 배우고
보이지 않는 힘 대처하는 상식 키워”
벽·기둥 등 기본 구조만으로 충분
시소, 철봉 없는 놀이터 구상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 허락하는 어른과 사회 중요”
▶ 서민우, 지정우 두 사람은 ‘아빠 건축가’로서 놀이터를 짓는다. 이들이 생각하는 ‘좋은 놀이터’는 키즈카페처럼 완벽한 놀잇감이 제공되는 곳이 아니라 뛰고 미끄러지고 매달리고 오르락내리며 아이들 스스로 몸의 이야기를 만드는 장소다. ‘다음 세대를 위한 건축’이란 화두로 작업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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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구름산책’에서 아이들이 바구니를 머리에 뒤집어쓰면서 놀고 있다. 이유에스플러스 건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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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떠나는 친구가 옛 동무에게 “어릴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고 하는 건 이유가 있다.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잎새 소리와 함께 “책장에 어룽지던 나무 그림자”가 등장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기억은 공간화된다. 즐거움, 행복함, 서러움, 분노, 배신감, 서글픔, 처연함 등 다양한 감정의 기억은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날의 풍경 속에 피어오른다.
서민우(48)·지정우(46) 두 사람이 각각 딸(서수인·11)과 아들(지유안·12)에게 해주고 싶은 일은 그런 거다. 빛과 바람, 천장의 높낮이, 바닥의 기울기, 흙·돌·나무·콘크리트·벽돌 같은 다양한 소재를 경험하면서 그 예민한 감각을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이 겹겹이 쌓여 풍부한 감성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 “나중에 현실 건축물과 도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더욱 좋은 일. 서민우·지정우 두 건축가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과 놀이터 만들기에 나선 이유다. ‘짓기’가 직업인 어른으로서 좋은 ‘아빠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다.
두 사람은 미국 유학시절 같은 대학원 선후배 인연으로 알게됐다. 2011년 지 소장이 먼저 사무실(EUK Architects)을 시작하고 2016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서 소장이 귀국하면서 공동으로 건축사무소(EUS+Architects·이유에스플러스 건축)를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아이들의 건축교육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두 사람은 주택·교회·박물관·미술관 등 다수의 건물을 설계할 때도 어린이들의 공간 경험에 초점을 맞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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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에스플러스 건축이 운동장 구령대를 이용해 설계한 동답초등학교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진효숙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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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 권리는 아이들의 중요한 인권
지난해 두 사람이 함께 소다미술관에서 연 어린이 놀이체험 전시 ‘구름산책’은 건축계 안팎에서 화제를 모았다. 구름산책은 2015년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열린 패션쇼에 출품한 ‘팝업 파빌리온’을 응용했다. 미술관 안팎 공간을 활용해 플라스틱 빨래바구니들을 주렁주렁 엮어 뭉게뭉게 구름을 표현하고 중간엔 비처럼 물을 뿌려 구름이 비가 되는 과정을 상상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바구니를 뒤집어쓰거나 두드리고 기어오르는 등 건축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신나게 놀았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놀이터 짓기에 나선 것은 어린이 권리옹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이 초등학교에 놀이공간을 만드는 사업에 참여하면서다. 놀 권리야말로 아이들의 중요한 인권이라는 데 착안한 세이브더칠드런은 2015년부터 ‘놀이터를 지켜라’ 캠페인을 진행해왔고, 지난해엔 건축가들과 협업해 서울과 전주의 초등학교 4곳에 놀이공간을 만들었다. 이 캠페인을 담당한 세이브더칠드런의 제충만 과장은 “졸업을 앞둔 서울의 한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이 어디냐’는 물음에 ‘화장실이 가장 마음이 편한 곳이었다’고 답하는 걸 듣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놀이공간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때문에 세이브더칠드런은 놀이터를 만들기 전 건축가들이 아이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반영해 디자인을 진행하도록 했다.
두 건축가가 처음 맡게 된 곳은 서울 동대문구 동답초등학교다. 설계에 앞서 3~6학년 학생 30명과 4주간 매주 워크숍을 열었다. 놀이공간을 어디에 만들면 좋겠냐는 아이들의 의견을 모아봤더니 운동장의 구령대가 뽑혔다. 요즘엔 전교생을 모아놓고 하는 조회 같은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구령대는 운동기구들을 넣어두는 창고 역할만 하고 있었다. 놀이공간에 어떤 것이 있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키즈카페나 전형적인 놀이터를 떠올리며 트램폴린·볼풀·미끄럼틀·시소 등을 원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특정 활동만 할 수 있게 용도가 정해진 시설보다는 창문·계단·벽·기둥·바닥 등 기본적인 건축구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놀 수 있다. 시소 없이 오르내릴 수 있고, 트램폴린 없이 뛸 수 있고, 철봉 없이 매달리고, 암벽타기 없이 기어올라가고, 미끄럼틀 없이 미끄러지는 방법을 생각해내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처음엔 놀이시설로 가득찬 놀이터 모형을 만들었던 아이들은 건축가들의 얘기를 듣고 벽·기둥 같은 건축적 기본 요소로 만들어진 놀이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과 아이들의 아이디어가 합쳐지면서 아무도 이용하지 않던 구령대는 경사대·계단·트리하우스 등을 갖춘 입체적 구조물로 다시 탄생했다. 재료는 철제프레임·나무·그물 등을 사용했다. 놀이터를 짓는 두사람의 원칙 중 하나는 “나무는 나무답게, 철은 철답게 재료의 물성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 소장은 “명확하고 진실된 표현일수록 아이들이 이해하고 조심하며 자신의 힘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세상을 배우고 놀이기구 또한 세상의 일부다. 놀이기구와 놀이터에서 힘이 전달되는 과정을 관찰하고 구조물이 구축된 방식을 잠재적으로 건강하게 깨닫는다. 그래야 어른이 된 후 세상의 보이지 않는 힘에 대처하는 상식을 키울 수 있다고 확대한다면 너무 과장일까.”(지정우 등 공저 <놀이가 아이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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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서울 퇴계로에 있는 ‘이유에스플러스 건축’ 사무실에서 지정우(왼쪽), 서민우 건축가가 해솔초등학교 놀이터(맨앞 왼쪽)와 유현초등학교 놀이터 모형을 앞에 놓고 앉아 있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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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를 찾지 못한 채 남아있던 동답초등학교의 운동장 구령대가 입체적인 놀이공간으로 변신했다. 진효숙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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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분위기가 또다른 건축가
아직 완공되진 않았지만, 이들은 파주의 해솔초등학교와 김포의 유현초등학교 놀이터도 설계해둔 상태다. 파주신도시에 세워진 해솔초는 산을 깎아 만든 평지에 세워진 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을 데려갈 노란 학원버스가 줄을 서고, 아이들은 학교의 앞문·뒷문을 놓고 “저 문은 월드메르디앙에서 사는 아이들이 오는 곳, 이쪽 문은 현대에 사는 아이들이 쓰는 문”으로 구분한다. 아이들은 “안전하고 창의적이고 차별없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놀이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바람을 받아 안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입체공간”을 계획했다. 정글짐·사다리·수직바·철봉 같은 기존 놀이시설 대신 나무데크 3개를 기울어진 형태로 이어붙여 ‘인공의 언덕’을 만들었다. 여기에 구멍·꿈틀거리는 봉·그물 등 간단한 장치 등을 이용해 아이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웅크리고 이야기하고 내려다보고 올려다보고 뛰고 눕고 앉고 미끄러지는” 공간을 설계했다.
서 소장은 “우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의 기호를 파악해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의 조합, 아이들의 자유로운 생각이 놀이가 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동답초, 해솔초와 형태는 다르지만, 유현초 놀이터에 담긴 디자인의 원칙도 같다. 나선형으로 높이가 올라가는 데크, 기어오를 수 있는 그물망, 철골프레임으로 기존 씨름장을 둘러싸는 원형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좋은 놀이터 설계’는 건축가의 몫만은 아니라고 했다. “물리적 놀이터 환경 자체만 중요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어른들,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가 또 다른 놀이터 짓기의 중요한 건축가 역할을 할 겁니다.”(지정우)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서민우·지정우는 누구?
홍대 건축과를 나와 코넬대에서 석사를 받은 서민우 소장과 고려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역시 코넬대에서 석사를 졸업한 지정우 소장은 각자 설계작업을 해오다 지난 2016년부터이유에스플러스 건축(EUS+Architects)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놀이터 외에도 주택, 미술관 등 공공건축물에서 아이들의 감성과 동선을 고려하는 건축을 해왔다. 함께 작업한 프로젝트로는 남산 애니메이션센터 당선안 디자인(공간사와 협업), 헤이리 피규어 뮤지엄, 잠실운동장 리노베이션 국제현상설계(3위)를 비롯해 최근 서울 서대문구에 문을 연 청년공유공간 ‘무중력지대 홍제’, ‘무중력지대 무악재’ 리노베이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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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배터리파크에 있는 상상놀이터. 아이들은 커다란 푸른색 블럭을 이용해 여러가지 형태를 만들 수 있다. 이유에스플러스 건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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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헥셔 놀이터. 인공 암반과 놀이시설, 맨하탄 고층빌딩 풍경이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유에스플러스 건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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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뛰어난 놀이터들 돌아보니
자연재료 사용…아이와 어른 섞여들게 설계
지정우 소장은 지난해 한국건축가협회의 지원을 받아 미국(뉴욕·보스턴·시카고·버밍햄), 일본(도쿄·오사카·나라), 싱가포르의 놀이터 30여곳을 둘러봤다. 일부 여정엔 서민우 소장도 함께 했다.
지 소장은 이 놀이터들의 뛰어난 점을 “흙과 나무 등 자연재료의 적극적인 사용, 구조체의 정직성을 드러내는 설계, 장소성의 표현, 유연한 프로그램, 모험심을 자극하는 디자인 등”으로 요약했다. 1960~70년대 뉴욕 센트럴파크의 놀이터 10여곳을 설계한 리차드 다트너의 작품들은 놀이터의 고전으로 꼽힌다. 뉴욕 거리의 흔한 재료인 코블스톤을 쌓아 만든 구조물과 공원 내의 거대한 암반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헥셔 놀이터, 원형의 모티브를 일관되게 적용해 디자인의 통일성을 살린 탓츠(tots) 놀이터 등은 디자인의 통일성과 풍경의 조화를 보여준다. 2007년 건축가 데이비드 록웰이 만든 맨하탄의 배터리파크 상상놀이터는 거대한 모래밭, 물, 커다란 파란색 폼(블럭)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은 블록을 이리저리 옮기고 끼워넣어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마음껏 흙장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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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의 덴리역 광장에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코후펀’. 이유에스플러스 건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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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 외곽에 있는 ‘파이브 필드 놀이 구조물’은 별다른 놀이 기구 없이 건축 요소로 재미를 느끼게 한다. 2016년 이 작품을 설계한 매터 디자인그룹은 이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유에스플러스 건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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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가 없어도 아이들은 얼마든지 놀 수 있다. 2016년 보스턴의 젊은 건축가 그룹인 매터디자인이 설계한 ‘파이브 필드 놀이 구조물’은 흙언덕 위에 벽·계단 등 기본적 건축적 요소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재미를 준다.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한 짚와이어도 설치해 밧줄을 타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뜻밖의 재료가 놀잇감으로 변하기도 한다. 앨러배마 버맹햄에 있는 라이온스파크는 지역 공동체에 필요한 건축물을 지어주는 루럴스튜디오가 설계한 것으로 재료비가 없어 쩔쩔매다 기증받은 드럼통 2000개로 꾸몄다. 산업폐기물을 활용하는 대신 열전도율과 안전도 등을 깐깐히 검증해 만들었다고 한다.
놀이터는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본 나라의 덴리역광장에 있는 ‘코후펀’은 사발을 뒤집어놓거나 바로 놓은 모양의 거대한 구조물로, 이 도시의 분지 지형과 곳곳에 있는 1600여개의 옛 무덤들(고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아이들은 흰 모래밭에서 뛰놀고 어른들은 계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섞여든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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