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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21 09:18 수정 : 2018.10.22 22:02

[토요판] 인터뷰
‘상 차리는 남자’ 조영학 번역가

“번역은 벌고 살기 위해 하는 부업이고, 밥하고 텃밭농사 짓는 게 요즘 저의 주업이다. 그게 훨씬 행복하다.” 조영학 번역가가 지난 16일 남양주시 자택의 부엌에서 텃밭에서 수확해온 나물을 무치고 있다.

▶요리가 취미인 남자들은 많지만, 삼시세끼 밥상을 책임지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가끔 하는 요리는 폼 나지만, 일상적으로 집밥을 차리는 것은 엄연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조영학 번역가는 벌써 10여년 동안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주부로 일하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집안이 누추하다는 말에도 조영학(59·이하 호칭 생략) 번역가의 집을 인터뷰 장소로 고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장르소설 분야에서 손꼽히는 번역작가의 작업실을 엿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상 차리는 남자’로 유명한 주부 조영학이 살아가는 실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그는 2015년 <상(차리는)남자? 상남자!>라는 책을 공저로 내기도 했다.)

집 안에서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살림이었다. 거실의 양지를 차지한 채 가을 햇살에 몸을 맡기고 있는 흙 묻은 고구마와 땅콩이 방문객의 눈길을 붙들었다. 고층 아파트의 거실에서 만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밭에서 온 작물과 달리, 병입한 채 숙성 중인 수제 맥주병은 햇볕이 닿지 않는 쪽 거실 바닥을 차지했다. 또, 부엌쪽 벽 아래에는 가지 말랭이와 다래순 말린 나물이 담긴 큰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조영학이 키워 갈무리하고 만든 것들과 눈 맞춰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에야 구석진 방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닿을 수 있었다. 작업실은 단촐하고 소박했다. 평범한 책상과 작은 책장 하나, 방바닥의 매트리스가 전부였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와 작은 스탠드 하나가 놓여 있고, 책장에는 그가 번역했거나 의뢰받은 원서만 몇권 꽂혀 있었다.

조영학 번역가의 작업실. 세간이 주로 재활용품일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하는 그의 작업실 역시 평범한 책상과 책장 하나를 갖췄을 뿐 단출하고 소박했다.
번역은 부업, 요리와 텃밭이 주업

-여기서 작업하나?

“그렇다. 새벽에 일어나서 식구들을 깨우기 전까지 두어 시간 일하고, 아침에 다 나가고 나면 다시 일하는 공간이다. 요즘은 이 곳에 머무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텃밭에 가고 산에도 가느라 바쁘다.”

-번역에 관한 책인 <여백을 번역하라>(메디치미디어)를 얼마전에 출간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평이 좋던데, 좋은 번역이란 뭔가.

“사람들이 의역이니 직역이니 또는 작가의 의도를 살려서 원작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저는 번역에는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번역은 좋은 글이어야 한다. 좋은 글이 되려면 쉽게 읽히고 주제도 선명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말답게 써야 한다. 예를 들면 ‘I have a good memory’를 원문에 충실하게 ‘나는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옮긴다. 그러나 우리말은 영어의 형용사+명사 체계가 아니라 명사+서술어 체계이기에 ‘나는 기억력이 좋다’라고 해야 맞다. 또, 시대나 작가의 배경 등을 이해해야 좋은 번역이 가능하다. 결국 역사와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우리말에 대한 공부가 관건이다.”

조영학은 2000년대초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옮긴 책은 80여권에 이른다. 호러와 스릴러, 판타지 등 남들이 어려워하는 장르소설이 전문 분야다. 좀비 소설의 고전인 <나는 전설이다>를 비롯해 <고스트라이터>, <히스토리언>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콘클라베> 등이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케이티앤지(KT&G) 상상마당 등에서 번역 지망생을 대상으로 출판 번역에 관한 강연도 여러 차례 해왔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작품은 뭔가?

“내년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지 50주년이다. 아폴로 11호에 탑승했던 마이클 콜린스의 자서전(Carrying the Fire)을 내년에 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동안 작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뭔가?

“번역 작업 초기에 했던 <히스토리언>(김영사)은 실수가 많아서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판권이 알에이치코리아로 넘어가서 다시 찍을 때 출판사에서는 몇 군데만 수정하자고 했지만 번역료를 적게 받을 테니 새로 번역하자고 요구해서 완전히 새로 번역했다. 의미 있게 기억나는 것은 <아서왕 연대기>(랜덤하우스코리아) 3부작이다. 4~5세기 로마어와 스코틀랜드 및 웨일즈의 옛말들이 많은 소설인데, 그 분야 전문가를 찾아 함께 용어 표기를 정리했다. 학문적인 연구까지 겸했던 일이어서 뿌듯하다.”

최근 국내 번역업계는 출판계의 침체 탓에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전업 번역가도 갈수록 줄고 있다.

-인공지능 번역 얘기도 나오고 있다. 번역시장이 어려워질 것 같다.

“미묘한 말의 뉘앙스 차이를 인공지능이 옮기기도 쉽지 않지만, 인공지능이 번역을 하더라도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인공지능의 번역이 제대로 나오려면 최소 2억 건의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2억 건을 누가 만드나. 다 번역가들이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방치하면 번역가가 다 굶어죽을 판이다. 지식 인프라를 살리려면 국가가 나서서 무슨 방도를 찾아야 한다.”

조영학은 ‘번역기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속도와 실력을 갖춘 번역가이지만, 다른 재주도 많다. 순전히 독학으로 익힌 야생화에 대한 지식은 전문 연구자에 뒤지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노래를 짓기도 했다. 가수 김상배가 부른 ‘당신’, ‘이 깊은 밤에’ 등이 그가 만든 노래다. 또, 집밥을 맛깔나게 차리는 주부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등 에스엔에스(SNS)에서는 번역가 조영학만큼 ‘?鍍─?그가 스스로를 칭하는, 부엌데기를 줄인 말) 조영학으로도 유명하다.

-번역가와 작곡가, 가사노동, 텃밭농사꾼, 야생화 전문가 등 하는 일이 많은데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뭔가?

“저는 음식하고 텃밭농사 일을 하는 게 가장 좋다. 둘은 맞물려 돌아간다. 텃밭에서 키운 작물을 위주로 밥상을 차린다.”

-집안일이 좋다고?

“그렇다. 처음에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겠다고 할 때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속으로 걱정도 했었는데 해보니까 정말 좋다. 아내도 나를 신뢰하고 아이들도 아빠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다. 지금 저에게 번역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부업일 뿐이고, 살림 살고 텃밭가꾸기가 주업이다.”

조영학 번역작가는 장르소설을 주로 다루는 전업 번역가이지만, 스스로 ‘부엌데기’로 부를 만큼 가사노동자이기도 하다. 지난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자택에서 가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요리를 시작했는데 제가 더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내 요리는 아내 전용”

그가 부엌 일을 비롯한 집안 일을 도맡은 것은 2005년 부인이 계단을 헛디뎌 발목을 다쳤을 때였다. 아내를 부축해 병원을 오갔는데 아내는 아픈 몸으로 식구들의 밥을 챙기면서 ‘바보처럼 넘어지는 바람에 남편을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했다. 순간 조영학은 진짜 미안해 할 사람은 자신임을 깨달았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돈을 벌어주기는커녕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술 마시면서 밖으로만 나돌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실제적인 도움이 뭘까 고민하다가 집안 일을 떠올렸다. 그는 아내 손을 잡고 “앞으로 부엌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했다. 마침 일년 전 대학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번역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아침 밥을 지어 상을 차리고, 부인과 아이들 도시락을 챙긴다. 낮에는 집안을 청소하고, 저녁에는 퇴근하는 아내를 위한 저녁 상을 준비한다.

-집에 둘이만 생활할 때야 상관 없겠지만,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부모 형제 등 가족들이 더 남자의 부엌일을 싫어하기도 하는데.

“저의 경우 그런 건 없었다. 친가나 처가나 다 제가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처가 등 친지 집에 갔을 때도 본인이 하나?

“저는 제 집사람 전용이다. 하하. 제가 밥상 차리는 것은 아내를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지 음식 만드는 자체가 너무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니까 밖에 나가서는 안 한다.”

조영학은 7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집이 너무 가난해 정규 교육은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까지만 받았다. 술만 취하면 행패를 부리는 새엄마가 무서워 17살 때 한 살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가출했다. 어린 나이에 도금공장과 금은세공, 인쇄소 등에서 일했다. 군대에서 폐결핵에 걸려 의병제대했지만, 몸이 아파 공장에 더 다닐 수도 없었다. 형의 도움으로 뒤늦게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1년 만에 고교 과정(중등과정 검정고시는 1975년에 마침)을 끝낸 그는 1985년 4년 장학생으로 한양대(영문과)에 입학했다. 동기생들보다 6살이나 많았지만, 2학년 때 학생장, 4학년 때 과대표에 선출될 정도로 동료들과 잘 어울렸다. 대학에서 과 후배였던 지금의 부인도 만났다.

-스스로 자청 했지만, 식단 고민부터 밥짓기, 설거지까지 대부분 혼자서만 할 때 억울하거나 서운한 생각은 안 드나?

“처음 결심할 때 ‘어차피 잘 나갈 인생도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이나마 행복하게 해 주자’며 시작했던 일이다. 그러려면 내가 하는 일을 공치사 하지 말고 짜증내지 말자, 또 절대로 귀찮아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지켜오고 있다. 그러기에 아내나 애들이 집안 일을 하는지 마는지에 대한 의식이 아예 없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기적의 선택이었다. 얻은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게 뭔가?

“그 전의 삶은 최악이었다. 대학원 박사과정 때 페미니즘을 공부했지만, 결혼 생활은 보통사람들과 똑같았다. 나는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려 놀았고, 가사노동은 아내 차지였다. 서로 힘들고 지치다 보니 부부싸움이 잦았다. 이혼 얘기도 오갔고, 죽고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밥상을 내가 차리면서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 했다. 지금은 서로 100% 신뢰하는 사이가 됐다. 번역 일거리도 끊기지 않고 들어왔다.”

-정말 행복해 보인다.

“그렇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시작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더 행복해진 것 같다.”

13년 전 다리 다친 아내 위해
“앞으로 부엌은 내가 맡을게” 약속
번역일 하면서 식사 빨래 등 도맡아

“가사노동 자임한 건 기적의 선택
부부 신뢰·행복 등 얻은 게 많아”

“좋은 번역은 우리말답게 옮기는 것
역사·사회 지식과 우리말 공부 필수
번역은 지식 인프라 담당하는 축
번역가 굶어죽기 전에 대책 세워야”

좋아하는 일 위해 돈벌이 줄인 자족의 삶

조영학이 행복한 건 자기 기준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돈이나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만족과 삶의 여유다. 그는 특급 번역자이지만 여전히 가난한 편이다. 경기 남양주의 집도 전세이고, 세간의 상당수가 재활용품이다. 그러나 그는 4년 전부터 좋아하는 일(텃밭농사)을 위해 돈벌이(번역)를 확 줄였다. 아내 역시 “형(대학 때의 호칭을 지금도 사용)은 행복할 자격이 있어”라며 그런 자족의 삶을 부추기고 즐긴다. 당시 구입한 가평 산골짜기의 맹지(접근로가 없는 땅) 400여평을 틈나는대로 일구는 게 이들 부부에게는 최고의 시간이다.

-집밥을 차리면서 삶의 태도가 바뀐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따라할 수는 없을 텐데.

“제가 부엌일을 한다고 하면 흔히 ‘요리를 좋아하는가 봐요?’라고 묻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요리에는 재능이 없어요’라고 당당히 말한다. 두 말에는 부엌일은 본래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 하루 세끼 늘 밥을 차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며,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다. 밥상 차리는 건 누군가를 위해 자기 시간을 들여 희생하면서 봉사하는 일이다. 각 가정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남자들도 집안 일을 나눠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럴 수 없다면 상대의 헌신에 고마운 마음이라도 가져야 한다. 그런 자세가 각자의 행복을 더해줄 수 있다고 본다.”

조영학 번역가는 집밥 전문가일 뿐 아니라 맥주와 막걸리도 손수 집에서 만들어 마신다. 그가 만들어서 병입한 뒤 숙성 중인 에일 맥주병.

-앞으로 계획은 뭔가.

“다른 계획은 없다. 지금대로 산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는 기자를 그가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싱크대 서랍에서 작은 비닐 봉투 3개를 꺼내 수제맥주와 고구마, 다래순 나물을 각각 담았다. “솔직히 저는 나눠먹는 게 제일 좋다.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조금씩만 담았으니 맛이나 보라”면서 손에 쥐어줬다. 조영학표 행복을 느껴보고 싶어 못 이긴 척 슬며시 비닐봉투를 받아들었다.

남양주/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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