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이상규 인터파크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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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전 인터파크 대표가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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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상규(52) 인터파크 전 대표이사는 벤처기업가로서의 21년을 한마디로 압축했다. 외환위기 여파로 모든 이들이 움츠러들던 1990년대 말, ‘청춘의 힘’이 그를 창업으로 나아가게 했다. 비포장도로 같았던 전자상거래업계에서 길을 닦아온 그의 청춘은 한국 벤처업계의 청춘 시절이기도 했다.
대표직에서 물러나 정든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는 그를 지난 20일 만났다. 서울 삼성동 인터파크 본사 18층 사무실에 걸려 있는 캐리커처 액자 속에서 그는 밝게 웃고 있었다. 이 전 대표는 7년2개월간 두 차례에 걸쳐 인터파크 대표를 지내고 11월9일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벤처기업이었던 인터파크는 21년 동안 30여 계열사를 갖춘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그는 또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31살 대리의 모험
1995년 대기업(엘지데이콤)에 다니던 이 전 대표는 회사 선배이자 친형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이기형 대리(현 인터파크홀딩스 회장)에게서 한 제안을 받았다. ‘소사장 제도’라는 사내벤처 육성제도를 통해 인터넷 쇼핑몰을 열자는 것이었다. 이기형 대리는 “인터넷으로 모든 걸 구매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테마파크 같은 인터넷’이라는 뜻으로 회사이름(인터파크)을 지었고, 1996년 6월 쇼핑몰을 열었다.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장외 멤버’처럼 손을 보태던 이 전 대표는 쇼핑몰 개장 직후인 1997년 초 팀에 합류했다.
28.8kbps 모뎀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던 20세기의 끝자락은 소비자들이 한번도 만져보지 않은 물건을 구매하겠다고 결정하기에는 조금 이른 때였다. 파리만 날리던 쇼핑몰을 살펴보다 이 전 대표가 떠올린 것이 책이었다.
―국내 첫 인터넷서점을 열었던 건데, 어떻게 아이디어를 냈나요?
“살길 찾아 이것저것 도전한 거죠. 특히 책을 떠올린 건 표준화돼 있으니까 잘 팔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웬걸요. 아니더라고요. 여전히 소비자들은 배송받는 상품을 낯설어하는 것 같았죠.”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길을 찾았다. 배송이 필요없는 티켓 판매와 여행서비스로 눈을 돌렸다. “그래도 처음엔 시원치 않았어요.” 시원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가 닥쳐왔고, 구조조정의 쓰나미가 몰아쳤다.
‘31살 이 대리’였던 1997년
인터파크 창업팀에 합류
외환위기 여파에 구조조정 위기
“직원 월급 구하러 다니는 게 일상”
초고속인터넷 보급으로 급성장
“가치 없는 기업은 금방 도태돼
…빈손으로 시작 가능한 토양 중요”
―외환위기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위기였겠습니다.
“인터파크도 모기업의 구조조정 대상이 됐죠. 하지만 도저히 사업을 접지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투자금 7억원을 3년간 나눠 갚는 조건으로 이기형 선배가 모기업으로부터 지분을 넘겨받았습니다.”
―진짜 ‘벤처’(모험)가 시작되니 앞이 캄캄하지 않았나요?
“투자하기로 약속했던 곳들마저 모두 말을 바꾸더군요. 예상했던 일이지만 불과 한두달 만에 돈이 다 떨어졌어요. 직원 15명의 밥줄은 챙겨야겠고, 월급 구하러 다니는 게 일상이었죠.”
그때 외환위기 속 고난의 행군을 견디게 한 것은 그로 하여금 창업에 나서게 한 ‘가치’였다고 했다.
“그때 우린 ‘전자상거래로 이루는 맑은 사회’라는 목적 하나로 힘을 냈습니다. 거래가 온라인으로 이뤄지면 뒷돈 주고받는 관행이나 부정거래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1999년에 이르러서야 숨통이 트였다. 이 전 대표의 기대는 초고속인터넷서비스(ADSL) 보급과 함께 실현될 수 있었다. 인터넷 대중화로 전자상거래 시장의 판이 펼쳐졌다. 1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린 건 창업 5년째인 2001년이었다. ‘아마존에 버금가는 쇼핑몰’, ‘주목할 만한 인터넷 상점’이라는 호평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성공을 거머쥔 듯했지만 그럴수록 원칙을 되새겼다고 한다.
“좋은 기업을 만들자는 게 원칙이었죠. 좋은 회사는 뒷돈 안 만드는 회사입니다. 재무적으로 비자금 안 만드는. 구성원들에게는 ‘도전하다가 잘 안돼도 봐주는’ 회사고요.”
그들이 꿈꿔온 것은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기업이었다. “고용, 부가가치 창출 같은 기업 본연의 기능 말고도 사회 발전에 보탬이 될 부분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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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전 인터파크 대표가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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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업을 만들 것인가
이 전 대표는 지난해 3월 다시 인터파크 대표이사로 부임하면서 부도난 회사를 인수했던 얘기를 꺼냈다. 대형 출판도매업체인 송인서적이었다. 연매출 500억~600억원대를 거둬온 국내 2위 서적도매업체가 만기가 돌아온 600억원대 어음을 막지 못해 1차 부도를 낸 터였다. 한 사기업의 부도를 넘어 한국 지식사회의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출판계 안팎에서 커져갔다.
―회생 불가능한 회사 인수를 놓고 뒷말이 많았습니다. 인터파크 책사업 적자도 늘지 않았나요?
“‘송인서적에 대한 심폐소생술을 해달라’는 출판계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책이 없으면 책 도매상(송인)도 없고, 서점(인터파크)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죠. 도매·소매 겸영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적도매업체가 무너지면 유통업체도 무사할 수 없다는 간단명료한 상생의 철학이다. 첫 대표이사 시절(2005~2010년) ‘블루스퀘어’ 공연장을 만든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블루스퀘어 자체는 ‘돈 되는 사업’은 아니지만, 공연을 안 하면 티켓도 못 팔죠.” 인터파크홀(1766석)과 아이마켓홀(1400석)로 구성된 블루스퀘어는 뮤지컬·콘서트에 적합한 음향으로 2011년 개관 때부터 공연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돈 안 되는 사업, 모순 아닌가요?
“물론 책 시장이 더 커지지 않는다는 부담이 있어요. 공연 시장도 다 해봐야 1조원이 안 되고요. 하지만 문화산업이 다른 산업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습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고군분투했지만, 현재 인터파크 여건이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인터파크 입지가 좁아졌다는 시장 평가가 많습니다. 전자상거래의 새 역사를 썼지만, 정말 성공한 걸까요?
“아마존이나 알리바바처럼 시장을 ‘석권’했으면 좋았겠죠.” 잠시 표정이 어두워지는 듯했지만 그는 “그래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여러 업체가 경쟁하는 게 독점보다 낫지 않겠냐”며 웃었다. “몇몇 업체들이 적자를 감수하면서 공격적으로 마케팅하고 있는 탓에 주목도가 떨어지는 측면은 있죠. 하지만 언제까지 가격을 내리고 마케팅에 돈을 쏟아붓는 식으로 ‘출혈 경쟁’을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는 “고객 충성도를 높여 내실을 다졌다”고 자평했다.
그는 21년 전 그때처럼 새로운 사업을 머릿속에서 궁리 중이다. “효율적인 전자상거래 터전을 만들기 위해 금융서비스를 결합하는 방안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겠죠.”
창업 아이디어에 대해 말을 아끼던 그는 ‘벤처 2기’라 할 스타트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화색이 돌았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어떻게 일굴 것인가가 요새 가장 큰 관심사”라고 말했다.
―최근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가요?
“당대에 부를 이룬 비율을 꼽는다면 한국은 낙제점입니다. 빈손으로 시작해도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죠.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21년 전과 비교해 개선된 게 있나요?
“제가 벤처 할 때는 한번 발을 헛디디면 복구가 정말 힘들었어요. 사재를 털어야 했고, 가족까지 위험을 나눠 가졌죠. 하지만 요즘은 ‘목돈’을 들이지 않아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일부 진일보했다고 봐요.” 산업 구조가 바뀌어 아이디어가 있으면 인프라에 거액을 투자하지 않고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고, 각종 스타트업 지원이나 공유오피스 등을 활용하면 유지비를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정적으로 성장해서 정착하는 기업은 손에 꼽지 않습니까?
“트렌드가 하루하루 달라지니까요. 그만큼 ‘대박’은 어려워진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기회다. 특히 사업가에게 그렇다. 이 전 대표 역시 초고속인터넷 보급이 성공으로 가는 발판이 됐다. “1990년대 말 인터넷 확산, 2010년 모바일 보급으로 여러 혁신이 이뤄졌습니다.”
기회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한국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다. 특히 오늘날 한국 청년들이 체감하는 우리 사회 불공정은 심각하다.
“불공정 문제는 기업 내부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배구조가 깨끗하지 않은 기업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책임지는 만큼 권한을 갖는 게 맞고, 편법 승계처럼 법을 우회한 문제는 논의 대상이 될 가치도 없죠.”
그는 한국 기업 생태계에서 불공정의 뿌리를 찾았다. 하지만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는 “편법경영, 오너 리스크 등이 사회에서 ‘문제’라고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과거와 많이 달라진 점”이라며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이 나아졌다”고 평가했다. 불공정의 문제를 간과할 일은 아니지만, 그에 매몰되어 자포자기해선 안 된다는 조언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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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전 인터파크 대표 사무실에 걸려 있는 캐리커처 액자.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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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대표는 스타트업 후배들을 돕는다. 벤처스타트업위원회 위원이고 소셜벤처 지원단체 ‘스파크’ 이사다. 한달에 한번 이상 후배 사업가들과 만나 소통하며 접점을 유지한다고 했다. 스타트업 후배들에게 전할 말을 요청하자, 긴말 대신 서가에서 책을 한권 꺼내 들었다. 김위찬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의 <블루오션 전략>이었다. “경쟁 대신 블루오션을 만들라는 게 책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가치 없는 기업은 금방 도태되더군요. 경쟁에만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좋겠어요. 창업한 회사를 떠나는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합니다.”
입양의 의미
그는 공정무역과 도서관 일에도 열의를 보여왔다. 건축가 승효상씨와 ‘시골의사’ 박경철씨 등과 2012년 함께 만든 것이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대표 이강백)다. 아동 착취와 환경 파괴의 무역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했다. 아내인 박영숙씨가 대표로 있는 느티나무도서관 후원회장이기도 하다.
아들·딸 두 아이를 기르던 이 전 대표 부부는 ‘불혹’에 접어든 2006년 입양을 결심했다. 8살 딸아이의 완강한 반대를 설득하는 데 1년이 걸렸다. 4년 뒤엔 한명의 아이를 더 품었다. 이번엔 이른바 ‘연장아 입양’이었다. 신생아 시기를 넘어 자라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다.
“낳는 것보다 키우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일단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배로 낳았냐, 가슴으로 낳았냐’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어요.”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과 아이를 기르는 일의 원리가 그에겐 다르지 않아 보였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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