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29 18:04
수정 : 2017.04.21 15:40
박찬수
2013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1.5세 청년 홍주영씨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발 행정명령을 내려서라도 서류 미비 이민자 1150만명이 추방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외쳤을 때, 그는 소수자를 위한 대통령 권한의 최대치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을 ‘제왕적’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참담한 실패는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를 안겼다. 거의 모든 후보가 ‘대통령을 추락시킨 제도 또는 시스템’과 거리를 두기 위해 또는 그걸 바꾸기 위해 공약을 발표했고,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한 예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 본관에서 세종로 정부서울청사로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수백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숲속 호젓한 관저에 틀어박혀 있던 박 전 대통령 모습은, 차기 대통령을 시민들과 가까운 곳으로 불러내는 강력한 동기일 수밖에 없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집무실을 청와대 경내 비서동으로 옮겨 참모들과 함께 일하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개 석상에서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에게 “대면보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던 박 전 대통령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상징적 행동이다.
이런 공약의 밑바탕엔 박근혜의 실패가 ‘대통령을 독불장군으로 만드는 청와대 구조 탓’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대통령과 참모를 분리한 청와대 구조가 역대 대통령 모두를 불통과 독선의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확장하면, 우리 정치 시스템이 ‘박근혜의 실패’를 구조화했다는 결론에까지 도달한다. 막강한 권력의 집중과 견제장치 미비가 제왕을 만든다, 그러니 시스템을 손봐야 한다,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탄생을 원초적으로 막는 게 곧 시대정신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주된 논리가 이것이다. 민주당을 탈당한 김종인 전 대표뿐 아니라, 정세균 국회의장도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너무 많은 권한이 남용돼 이런 일(최순실씨 사건)이 벌어졌다. 이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의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은 탄핵심판 선고문의 보충의견을 통해 “대통령 개인의 탄핵심판을 넘어, 정치적 폐습을 조장한 권력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심지어 전례 없는 국정난맥의 주범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자신의 실패를 시스템 탓으로 돌린다. 그는 지난해 4월 총선 직후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우리나라가 대통령 중심제라고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꿈도 많고 의욕도 많고 어떻게든 해보려 했는데…”라고 한탄했다. 내용은 다르지만, 정권의 실패가 한국 대통령 제도 때문이란 인식에선 동일하다.
이런 지적엔 분명 귀 기울일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공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인사와 정책 결정의 상당 부분을 위임할 정도로 국정을 방기한 책임을, ‘박근혜’란 개인이 아니라 제도에서 먼저 찾는 건 올바른 해결을 어렵게 한다. 특히 조기 대선으로 서둘러 출범하는 차기 정권에는 제대로 일을 하기 힘든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대통령 개인의 일탈과 실패를 시스템의 실패로 손쉽게 환원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 절대 악은 아니다. 정부 역할을 확대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탄생한 게 제왕적 대통령이다.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의 경제·사회 분야 정책 집행권한을 대폭 확대한 건 대공황 극복을 위해서였다. 대통령 권한 확대는 1940~50년대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외교·안보 분야로까지 확대됐다. 이는 결국 워터게이트와 같은 극단적인 권력 남용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런 잘못이 ‘큰 정부’를 추구했던 초기 이상마저 훼손하는 건 아니다. 2013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1.5세 청년 홍주영씨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발 행정명령을 내려서라도 서류 미비 이민자 1150만명이 추방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외쳤을 때, 그는 소수자를 위한 대통령 권한의 최대치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을 ‘제왕적’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제도든 형식이든 바꿀 게 있으면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역대 대통령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지는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박근혜 몰락의 교훈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국회를 설득하고 협력할 것, 둘째, 인사는 정부 조직에 의존할 것, 셋째, 정책 결정 과정에 다양한 집단을 참여시킬 것 등이다. 사실 이건 굳이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지 않아도 현행 헌법 아래서 충분히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대통령 의지다. 그런 의지를 가진 대통령을 뽑는 일이다.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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