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4.19 17:40 수정 : 2017.04.21 15:39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김경환(53)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자다. 엔엘(NL)계 지하당인 ‘민혁당 사건’으로 3년9개월을 복역하고 2003년 출소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안관찰처분 대상자’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원적, 본적, 주거, 가족 및 교우관계, 재산, 학력, 경력, 종교 등을 빼곡히 적어 경찰서에 제출해야 했다. 이사를 하면 바뀐 주거지의 경찰서에 다시 신고를 해야 했다.

한번은 담당 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두번이나 거주지 이전 신고를 하지 않아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는 것이었다. 1종 운전면허를 따려고 준비 중이던 김씨는 어쩔 수 없이 경찰서를 찾았다. 형식적 조사를 끝낸 뒤 담당 형사가 말했다. “이렇게 나오면 될걸 왜 그동안 비협조적이었어요?” 김씨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고 한다. 정상과 비정상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순간이었다.

김씨는 2013년 법원에 ‘보안관찰처분 기간갱신결정 취소 청구 소송’을 냈다. 2년마다 갱신하는 보안관찰처분 연장을 중단해 달라는 요구였다. 법무부는 ‘김씨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2014년 10월 법원은 김씨 손을 들어줬다. 김씨는 3개월마다 활동 내용을 경찰에 보고해야 하는 ‘피보안관찰자’ 신분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김씨는 운이 좋은 경우다. 5공 때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됐던 강용주(55·의사)씨는 최근 보안관찰법상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식 재판에 넘겨졌다. 강씨 소식을 접하고, 보안관찰법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 속박을 잊고 지낸다. 보안관찰법이 아직 살아 있다는 데 소스라치고, 국가보안법에 무감각해진 나 자신에 순간적으로 놀란다. 많은 이들의 책장에서 과거 이적표현물이라 불리던 책 몇권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해외에서 북한식당을 가고 북한 사람들과 대화를 해도 그게 위법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시대다. 지금 이 순간 국가보안법이 나의 사상과 정치적 권리를 제약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국가보안법이란 낡은 유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자”며 보안법 폐지를 공개 제안했던 게 벌써 13년 전이다. 박근혜 대표가 이끌던 한나라당의 격렬한 반대로 ‘국가보안법 파동’으로까지 번졌던 게 2004년의 일이다. 그렇게 폐지 논의는 흐지부지됐고, 이젠 ‘개정하자’고 말하는 정치인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보수든 진보든 별로 불편한 거 없이 사는데, 굳이 해묵은 이념 논쟁을 촉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뒷받침하기 위해 탄생한 보안관찰법 역시 다르지 않다. 유엔 고문방지협약 이행을 위한 한국 정부의 보고서를 보면, 보안관찰법의 존속을 주장하는 주된 논거는 이렇다. “2006년 이후 국회에 이 법의 개정 법률안이 제출된 바 없다.” 국내에서 이 법의 인권침해 요소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별로 없으니 굳이 폐지 또는 개정할 필요성이 없다는 논리다.

보안관찰 대상자의 수나 심사 과정, 근거를 정부는 공개하지 않는다. 몇년 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출소 전후와 거주지 이전 때마다 경찰에 자진신고를 해야 하는 ‘보안관찰처분 대상자’는 2200여명, 이보다 훨씬 엄격한 신고의무를 지닌 ‘피보안관찰자’는 40여명이었다. ‘보안관찰처분 대상자’는 한번 리스트에 오르면 죽을 때까지 빠져나갈 수가 없다. 언제든 ‘피보안관찰자’ 같은 주요 감시 대상에 오를 수도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사면복권을 받아 이미 지워졌는데도 ‘내면의 불순함’과 ‘재범의 위험성’을 임의로 재단하는 보안관찰법은 지울 수가 없다.

적폐(積弊)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뜻한다.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한 사람도 빼지 않고 계속 더해서 리스트에 올리는 보안관찰 대상자 명단이야말로 ‘적폐’란 단어에 딱 어울리는 형태가 아닐까 싶다. 이번 대선을 ‘보수가 몰락한 초유의 선거’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런 적폐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대통령 후보를 찾기란 쉽지 않다.

2년마다 보안관찰 갱신심사를 받으러 가는 사람에게 대한민국 검사는 대부분 “별로 불편한 건 없지요?”라고 묻는다. 가끔 자진신고만 성실히 하면 될 일인데 뭐 불편할 게 있겠는가. 바로 이런 사고에서 국가권력의 횡포함은 싹튼다.

pcs@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찬수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