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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10 16:27 수정 : 2017.05.10 21:56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영광의 순간은 짧고 고뇌와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했던 말이다. ‘대통령이란 자리’의 무게를 이처럼 간결하게 표현한 말도 드물다. 1992년 대선에서 큰 표차로 승리하고 임기 초반 90% 넘는 지지율을 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 뒤 아들과 측근 비리, 미증유의 국가부도 사태로 큰 고통을 겪었다. 그에게 ‘영광의 순간’은 대통령 당선부터 인수위원회, 그리고 취임식 직후 거침없이 개혁의 칼을 휘두르던 불과 몇달뿐이었다. 아니, 그 몇개월조차 숱한 고민과 번뇌, 선택의 기로에서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안쓰럽기 짝이 없다. 현직의 무게에서 잠시 비켜나 승리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인수위원회 기간마저 그에겐 허용되질 않는다. 영광의 순간은 벌써 지나가버렸는지 모른다. 당선 첫날인 어제 아침 8시 그는 대통령 당선증을 받아들고 곧바로 야 4당을 찾아갔다. 국회에서 약식 취임식을 하고, 신임 국무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장, 국정원장을 발표했다. 오늘부터는 주요 수석비서관을 공개하고 부처 장관들의 인사 검증에 들어가야 한다. 부처 업무보고를 받고 새 정부의 정책 기조를 확산해야 한다. 매 순간이 여론 비판과 야당 공세에 노출될 수 있는 가시밭길이다. 애당초 권력이란 건 이렇게 양면적인 것일까.

새 대통령 앞에 놓인 정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문 대통령을 ‘친북좌경’이라 공공연히 비난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초반 열세를 딛고 24%의 득표율로 2위로 올라섰다. 정치인 홍준표의 컴백인 동시에 탄핵 반대세력의 부활이다. 홍준표 후보가 강경보수 정치인으로 뚜렷한 각인을 남긴 건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첫 정권교체 직후였다. 구제금융 사태로 나라를 거덜냈고 그 여파로 사상 처음 정권을 내준 처지였지만, 야당으로 변신한 한나라당은 주눅들지 않았다. 국회를 파행시키면서까지 새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인준을 수개월간 거부했다. 각종 경제 입법과 정부조직 개편의 발목을 잡았다.

그 중심엔 초선 의원들이 있었다. ‘겁없는 아이들’이라 불린 한나라당 초선 의원들이 바로 홍준표를 비롯해 김문수 이재오 안상수 등이었다. 그때의 한나라당이 지금 자유한국당에겐 뒤따라야 할 전범이다. 10년 만에 정권을 넘겨주고 국정농단 책임까지 졌지만, 자유한국당은 선거 때보다 더 날카롭게 새 정권을 할퀴려 들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작부터 제1야당의 격렬한 정치 공세에 맞서야 한다.

고난은 반대편에서만 오지 않는다. 새 대통령을 뽑은 건 4200만 유권자들이고, 그들은 지난겨울 광장에서 변화의 열망을 외쳤던 촛불 시민들이다. 세상을 바꾸자는 바람과 눈물이 문재인 대통령을 뽑은 한표 한표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 지지층의 기대가 새 대통령과 정부에겐 엄청난 무게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그러나 단박에 모든 소망을 이룰 수는 없다. 친박이 재결합한 제1야당을 격파하고 저 멀리 내달리고 싶지만, 그건 쉽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준비 없이 출범하는 ‘보궐선거 대통령 시대’라는 걸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한다.

개혁 과제가 많을수록 훨씬 정교하고 단계적으로 실현할 로드맵이 필요하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집행할 유능한 사람들을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대로 충원해야 한다. 인사도, 정책 수립도, 개혁과제 추진도 너무 서둘다가는 오히려 실수를 연발하며 저항만 부추기기 쉽다. 문재인 정권의 성공을 바란다면, 임기 초반엔 인내를 갖고 묵묵히 지켜보는 게 필요하다. 기대치를 낮추고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개혁은 집권 초기에 추진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국민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게 결과물을 내놓는 일이다. 결국 5년 집권의 총체적 결과로 ‘대통령 문재인’은 평가받으리란 걸 잊지 말기 바란다.

기사회생한 자유한국당은 20년 전처럼 강하게 정권을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정국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5년 뒤 민심을 얻긴 어렵다는 게 1998년의 한나라당이 주는 진짜 교훈이다. 유례없는 국정농단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집권 초기에 인내를 갖고 지켜보며 때론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어줄 ‘책임’은, 지지자뿐 아니라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에게도 함께 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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