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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31 17:03 수정 : 2017.05.31 20:55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풋, 신문을 보던 아내가 웃는다. 줄 서서 식판에 밥을 타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든 대통령 때문이다. 그렇게 신기할까.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외쳤던 노태우 대통령은 서류가방을 직접 들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회의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장차관들과의 점심을 칼국수로 때웠다. 그땐 그런 게 다 큰 뉴스거리였다.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박근혜의 4년’이 국민과 대통령의 관계를 얼마나 단절했으면 지금 이럴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보통사람 노태우’는 4천억원의 비자금을 국민 몰래 빼돌렸다가 구속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아들 비리와 외환위기로 나라를 거덜내다시피 했다. 취임 초기의 파격 행보와 격식 파괴가 정권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국민은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안다. 그래서 환호와 열광의 뒤안에선, 그게 얼마나 오래갈까 하는 생각이 그림자처럼 아른거린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정권 초기 모든 대통령이 하는 퍼포먼스의 하나일 수 있다. 그래서 얼마 못 가 언론과 국민의 관심 밖으로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딱 하나, 후임 대통령과 모든 공직자의 전통으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게 있다. 대통령이 관저의 식비와 비품비를 자기 급여에서 내겠다는 약속이다. 와이셔츠 차림이나 식판을 직접 드는 것과 달리, 이 사안은 훨씬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임무와, 사적 헌신 및 이익 추구가 묘하게 얽혀 있는 한국 사회의 조직문화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권력형 비리의 대부분은 공과 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전근대적 집단주의와 온정주의에서 비롯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자. 그는 나태한 사람이 아니다. 관저 요리사에 따르면, 청소시간에도 책상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서류를 들여다봤다. 밤낮없이 국가를 생각하는데 관저에만 머문다고 무슨 대수인가, 그런 대통령에게 최순실씨가 옷을 대주는 등 도움 준 건 선의가 아닌가, 또 그 대가로 대통령이 ‘약간의 호의’를 베푼 게 그리 비난받을 일인가,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의식은 우리 사회 전반에 넓고 깊게 뿌리내려 있다.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사회, 그 집단을 위해 개인을 내던지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회사에 우리는 몸담고 산다. ‘내가 그렇게 희생했으니 이 정도의 일탈은 누릴 만하다’는 인식을 정권 꼭대기부터 사회 밑바닥까지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다.

이 정서, 온정적 집단주의가 우리 사회의 눈부신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이끈 동력이란 걸 부인할 수는 없다. 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이른바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집단을 위한 헌신을 당연스레 여기고, 내부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는 걸 ‘인간적 의리’라고 생각하는 풍토는 독재정권과 재벌 기업뿐 아니라 민주 진영 내부에도 상당히 폭넓게 퍼져 있다. 요즘 ‘86세대’가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정서에서 여전히 탈피하지 못한 탓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미국에선 백수십년 전에 나온 ‘공식 만찬도 아닌데 대통령 가족끼리 먹는 밥 값을 왜 국민 세금으로 내는가’란 물음을 우리 사회에선 한번도 제기하지 않은 이유다. 미국은 1800년대부터 국빈 만찬 등 공식 연회를 제외한 대통령 가족 또는 친구들과의 개인 식사 비용은 대통령 급여에서 공제하고 있다. 치약·칫솔, 대통령이 입는 양복의 드라이클리닝 비용도 내야 한다.

집무공간과 주거공간이 붙어 있는 백악관에서 공적·사적 비용을 어떻게 구분할까 궁금했는데, 백악관 집사가 총지출 중 대통령 가족의 사적 비용이라 판단하는 부분은 내역서로 만들어 매달 청구하는 형식이라 한다. 청구서 내역을 놓고 간혹 퍼스트레이디와 집사가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 청와대에서 백악관 집사 역할을 하는 게 총무비서관이다. 과거 대통령들이 핵심 측근을 총무비서관에 앉힌 건 예산의 사적인 활용과 무관하지 않다.

최순실 게이트야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라 쳐도, 역대 모든 정권에서 크든 작든 권력형 비리가 반복된 이유는 이런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젠 그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날, 총무비서관이 세세히 기록한 5년간의 대통령 급여 공제내역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대통령의 이런 원칙은 장차관을 비롯한 모든 고위 공직자로 확대되어야 한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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