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실장 하루 새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바람 잘 날 없는 게 정치라지만, 최근 며칠간 일어난 ‘사건’들은 한국 정치의 지형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우선, 정의당이 새 대표로 이정미 의원을 뽑았다. 세대 교체다. 지금은 은퇴한 진보정치 1세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1997년 대선에 처음 출마했을 때, 그의 나이 56살이었다. 2007년 민노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심상정 전 대표는 48살이었다. 이제 51살의 이정미 대표가 진보정당의 키를 잡았다. 젊은 리더십의 순조로운 등장은 기성정당에선 보기 힘든 현상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본격적인 대중적 진보정당의 출현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처음이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기록한 정당 득표 13.1%, 국회의원 10석은 지금도 꿈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뒤 엔엘(NL)과 피디(PD)의 갈등, 분열, 통합진보당으로 재통합, 부정경선 사태를 거치며 진보정치는 만신창이가 됐다.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운 게 정의당이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정의당은 정당 득표율 7%를 기록했다. 19대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는 200만표(6.2%)를 얻었다. 역대 진보정당 후보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이다. 2004년의 영광을 뛰어넘을 기반은 어느 때보다 다져진 것처럼 보인다. 심상정 전 대표는 퇴임 기자회견에서 “진보적 대중정당의 기틀을 닦은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대중적 진보정당’에서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수식어가 바뀐 게 의미 있다. 국회 안팎에선 개헌론과 맞물려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의 목소리가 높다. 정의당이 2020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나 그에 근접하는 의석을 확보하면 한국 정치엔 말 그대로 파란이 일 것이다. 진보정당의 맞은편엔 자유한국당이 있다. 진보를 ‘종북’으로 몰아붙여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극우 색깔의 정당이다. 홍준표 대표는 대선 내내 “집권하면 종북 집단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종북’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원래 진보진영 내부에서 북한 정권에 우호적인 그룹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종북’이란 단어를 살짝 가져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한 보수의 기민함은 혀를 내두를 만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빨갱이의 21세기 버전인 ‘종북’ 딱지를 붙이는 데 급급했던 보수정치의 말로를 박근혜 정권은 분명히 보여줬다. ‘종북’이란 낙인은 더이상 상대방을 벨 수 있는 예리한 칼이 아니다. 스스로의 무공을 높일 비전의 신공은 더더욱 아니다. 며칠 전, 자유한국당에서 떨어져나온 바른정당이 “이제 ‘종북몰이 보수’를 청산하자”고 한 건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최홍재 바른정책연구소 부소장은 토론회에서 “종북은 의미 없는 존재다. 오직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의 희망 속에만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풍차처럼 ‘가상의 적’을 향해 돌진하는 홍준표 후보에게 보수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780만표(24%)를 몰아줬다. 보수의 혁신과 재정립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박근혜 정권에서 파탄난 박정희식 국가주의와 극우·반공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지 않고는 보수 정치세력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종북몰이’가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선 보수의 진정한 가치인 자유주의는 언제나 배척될 수밖에 없다. 보수의 비극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기로에 한국 보수는 서 있다. 여기에 중도를 표방하는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이 터졌다. 국민의당은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명분은 여야의 극한적 대립을 뛰어넘는 ‘제3의 정치세력’이었다. 정치인 안철수의 실험은 성공한 듯 보였다. 총선에서 양당에 못지않은 득표율로 제3당에 올라섰고, 대선에선 안철수 후보가 당선을 넘보기도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제보 조작 사건은 모래 위에 날림으로 세운 정당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조작부터 그 이후 대응까지, 국민의당은 대중정당의 모습을 상실했다. 안철수 후보는 ‘신생 정당의 미숙함’ 탓으로 돌렸지만, 국민은 ‘급조 정당의 필연적 귀결’이라 여긴다. 안 후보가 이 간극을 뛰어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헌정 초유의 탄핵 사태는 대통령 한 사람의 퇴진과 정권 교체로 끝난 게 아니다. 우리 정치 전체를 거대한 격랑과 재편의 바닷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pcs@hani.co.kr [관련 영상] | <한겨레TV> 더정치
칼럼 |
[박찬수 칼럼] 정치 지각변동의 시작 |
논설위원실장 하루 새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바람 잘 날 없는 게 정치라지만, 최근 며칠간 일어난 ‘사건’들은 한국 정치의 지형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우선, 정의당이 새 대표로 이정미 의원을 뽑았다. 세대 교체다. 지금은 은퇴한 진보정치 1세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1997년 대선에 처음 출마했을 때, 그의 나이 56살이었다. 2007년 민노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심상정 전 대표는 48살이었다. 이제 51살의 이정미 대표가 진보정당의 키를 잡았다. 젊은 리더십의 순조로운 등장은 기성정당에선 보기 힘든 현상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본격적인 대중적 진보정당의 출현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처음이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기록한 정당 득표 13.1%, 국회의원 10석은 지금도 꿈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뒤 엔엘(NL)과 피디(PD)의 갈등, 분열, 통합진보당으로 재통합, 부정경선 사태를 거치며 진보정치는 만신창이가 됐다.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운 게 정의당이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정의당은 정당 득표율 7%를 기록했다. 19대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는 200만표(6.2%)를 얻었다. 역대 진보정당 후보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이다. 2004년의 영광을 뛰어넘을 기반은 어느 때보다 다져진 것처럼 보인다. 심상정 전 대표는 퇴임 기자회견에서 “진보적 대중정당의 기틀을 닦은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대중적 진보정당’에서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수식어가 바뀐 게 의미 있다. 국회 안팎에선 개헌론과 맞물려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의 목소리가 높다. 정의당이 2020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나 그에 근접하는 의석을 확보하면 한국 정치엔 말 그대로 파란이 일 것이다. 진보정당의 맞은편엔 자유한국당이 있다. 진보를 ‘종북’으로 몰아붙여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극우 색깔의 정당이다. 홍준표 대표는 대선 내내 “집권하면 종북 집단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종북’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원래 진보진영 내부에서 북한 정권에 우호적인 그룹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종북’이란 단어를 살짝 가져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한 보수의 기민함은 혀를 내두를 만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빨갱이의 21세기 버전인 ‘종북’ 딱지를 붙이는 데 급급했던 보수정치의 말로를 박근혜 정권은 분명히 보여줬다. ‘종북’이란 낙인은 더이상 상대방을 벨 수 있는 예리한 칼이 아니다. 스스로의 무공을 높일 비전의 신공은 더더욱 아니다. 며칠 전, 자유한국당에서 떨어져나온 바른정당이 “이제 ‘종북몰이 보수’를 청산하자”고 한 건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최홍재 바른정책연구소 부소장은 토론회에서 “종북은 의미 없는 존재다. 오직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의 희망 속에만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풍차처럼 ‘가상의 적’을 향해 돌진하는 홍준표 후보에게 보수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780만표(24%)를 몰아줬다. 보수의 혁신과 재정립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박근혜 정권에서 파탄난 박정희식 국가주의와 극우·반공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지 않고는 보수 정치세력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종북몰이’가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선 보수의 진정한 가치인 자유주의는 언제나 배척될 수밖에 없다. 보수의 비극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기로에 한국 보수는 서 있다. 여기에 중도를 표방하는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이 터졌다. 국민의당은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명분은 여야의 극한적 대립을 뛰어넘는 ‘제3의 정치세력’이었다. 정치인 안철수의 실험은 성공한 듯 보였다. 총선에서 양당에 못지않은 득표율로 제3당에 올라섰고, 대선에선 안철수 후보가 당선을 넘보기도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제보 조작 사건은 모래 위에 날림으로 세운 정당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조작부터 그 이후 대응까지, 국민의당은 대중정당의 모습을 상실했다. 안철수 후보는 ‘신생 정당의 미숙함’ 탓으로 돌렸지만, 국민은 ‘급조 정당의 필연적 귀결’이라 여긴다. 안 후보가 이 간극을 뛰어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헌정 초유의 탄핵 사태는 대통령 한 사람의 퇴진과 정권 교체로 끝난 게 아니다. 우리 정치 전체를 거대한 격랑과 재편의 바닷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pcs@hani.co.kr [관련 영상] | <한겨레TV> 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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