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8.23 16:35 수정 : 2017.08.23 20:46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2003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마이클 브라운을 연방재난관리청(FEMA) 청장에 지명했을 때 이를 주목한 미국 언론은 거의 없었다. 전임 청장인 조 올보는 “이보다 훌륭한 인사는 없다”고 브라운을 치켜세웠다. 올보와 브라운은 오랜 친구 사이였고, 둘 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의 당선을 도왔다. 2년 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쳤다. 둑이 무너지면서 도시는 물에 잠겼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수만명이 고립됐다. 도심에선 며칠간 약탈과 방화, 총격이 난무했다. 허리케인과 홍수, 뒤이은 폭력사태로 1800명 이상이 숨졌다. 세계 최강대국에서 벌어진 전례없는 재난이었다.

연방재난관리청은 홍수 예방과 경보에 실패했고, 사후 대처도 엉망이었다. 브라운 청장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을 부시 대통령은 “브라우니”(브라운의 애칭)라고 부르며 격려했다. 여론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태 수습 중엔 좀처럼 사람을 바꾸지 않는 미국에서 브라운은 전격 경질됐다. 이라크전에도 끄떡없던 부시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이후 레임덕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브라우니’는 정부의 정책 실패 또는 인사 실패를 뜻하는 상징어가 됐다.

연방재난관리청 수장은 항상 대통령의 정치적 후원자가 가는 자리였다.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국토안보부 외청에 ‘브라우니’를 보낸 게 부시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인사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여론의 관심에서 벗어난 자리라도 최소한의 자질을 갖춘 사람을 쓰지 않으면 언제 어떤 일로 부메랑이 되어 권력을 해칠지 모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뉴올리언스 도심이 물에 잠기자 미처 피난하지 못한 흑인주민들이 고가도로 위로 몰려들었다. 뉴시스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을 보면서 문득 마이클 브라운을 떠올린다. 정치적 이유로 사람을 쓰는 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대통령 선거운동에 참여한 인연으로 정부기구 수장에 임명됐다. 전문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공직을 수행할 자질과 능력을 갖췄느냐는 점이다. 평소엔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공직자의 자세와 능력’이 위기 때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위기는 전혀 뜻밖의 영역에서 발생해 뉴올리언스 대홍수처럼 정권을 송두리째 수렁에 빠뜨릴 수 있다. 류영진씨를 식약처장에 임명할 때 살충제 달걀 파동과 같은 대형 사건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카트리나로 결정타를 맞은 부시와 달리, 살충제 달걀 파동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휘청거리진 않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국민에게 “매우 송구스럽다”며 먼저 고개를 숙였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 졌다. ‘브라우니’라고 말한 부시처럼 류 처장을 격려하지도 않았다. 관료나 기관장의 잘못을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로 덮고 방어해주며 앞으로 나가는 모양새다.

문제는, 박기영 전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이어 류영진 식약처장 사례에서 보듯이 비슷한 패턴의 잘못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인수위원회도 없이 출범한 새 정부는 초기 장관·수석비서관 인사에서 참신하고 폭넓은 발탁으로 갈채를 받았다. 국회 인사청문 과정에서 두 명의 장관 후보자가 낙마하긴 했지만, 과거 정권에 비하면 괜찮은 결과다. 그런데 인사청문회를 거칠 필요가 없는 ‘덜 중요한’ 공직 인선에서 오히려 문제가 드러난다. 정권 출범 직후의 긴장감이 느슨해지면서 청와대 민정과 인사수석실의 엄격한 추천·검증 기능이 약화되는 게 아니냐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 속에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틈새를 만들고, 그 틈새를 여러 형태의 ‘정치적 고려’가 파고든다. 박기영 순천대 교수를 차관급인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임명하면서 청와대 대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 자리는 박 교수가 오래전에 했던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과 같은 급의 직책이고 더 나은 자리가 아님을 고려했다.” 아주 좋은 자리도 아닌데 그 정도면 여론도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판단이 류영진씨를 식약처장에 기용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우니’ 사례에서 보듯, 정권의 위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대통령의 신념과 가치를 잘 정책화해서 집행하는 유능하고 자격있는 사람들로 정부를 채워야 한다. 누가 선거를 도왔느냐보다 누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사가 만사’라는 격언은 지금 문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다.

pcs@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찬수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