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12.31 15:26 수정 : 2018.12.31 22:46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대통령이란 자리가 감내해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를 ‘대통령 수칙’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 무렵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해진 숱한 정치적 음해와 비난에, 인간으로서 흔들리는 감정의 숨결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시절 주요 회의 때마다 들고 다니던 국정노트 71쪽엔 ‘대통령 수칙’이 적혀 있다. 언제 무슨 계기로 그걸 직접 썼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시기 또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던 1998~99년 무렵에 적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몹시 어렵던 시기에 대통령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한 일종의 ‘자경문’(自警文)인 것처럼 보인다. 처음엔 ‘대통령 수칙’이라 이름 붙였다가 ‘대통령’이란 단어가 좀 걸렸는지 펜으로 죽죽 지우고 그냥 ‘수칙’이란 제목으로 15개 항을 적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감내해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를 ‘대통령 수칙’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 무렵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해진 숱한 정치적 음해와 비난에, 인간으로서 흔들리는 감정의 숨결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첫째 항목은 이렇다. ‘1. 사랑과 관용, 그러나 법과 질서 엄수해야.’ 이런 내용도 있다. ‘6. 불행한 일도 감수해야. 다만 최선 다하도록. … 8. 국회와 야당의 비판 경청. 그러나 정부 짓밟는 것 용서 말아야. … 10. 언론의 보도를 중시하되 부당한 비판 앞에 소신 바꾸지 말아야.’

정치적 반대편의 비판과 공격을 관용하고 경청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은 서운함과 분노의 한자락을 행간에서 느낄 수 있다. ‘대구경북엔 추석이 없다’는 식으로 지역갈등과 경제위기론을 부추기던 보수언론, 그리고 야당의 무자비한 막말 공격에 직면했던 대통령의 인간적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김대중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선숙 국회의원은 “대통령 입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버리겠다는 야당 국회의원 발언에 대통령은 몹시 상심했다”고 그때 분위기를 전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노트에 작성한 ‘수칙’ 15개 항. 처음에 ‘대통령 수칙’이라 이름 붙였다가 지우고 그냥 ‘수칙’이란 제목을 달았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아마 요즘 문재인 대통령의 심경이 그 무렵의 디제이(DJ)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을 ‘북한 정권의 수석대변인’이라 공공연히 부르고, 적폐 수사를 ‘원한과 증오에 한맺힌 정치보복’이라 비난하며, 심지어 대통령 취임연설문에 담긴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전두환 군사정권의 ‘정의사회 구현’에 비유하고 조롱하는 야당과 보수언론 앞에서, ‘비판을 경청하자’는 당위론적 가치와 ‘짓밟는 걸 용서할 수 없다’는 솔직한 심정이 누군들 교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결국 국민이 이해해줄 거란 믿음을 갖고, 모든 걸 가슴에 차곡차곡 쌓으며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게 대통령이란 자리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곱째 항목에 ‘국민의 애국심과 양심 믿어야. 이해 안 될 때 설명방식 재고해야’라고 적은 건 그런 뜻을 담은 것이라 생각해본다.

디제이의 ‘수칙’은 누구나 아는 당연한 덕목을 나열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대목들이 그렇다. ‘2. 인사정책이 성공의 길. 아첨한 자와 무능한 자를 배제.’ ‘9. 청와대 이외의 일반 시민과의 접촉에 힘써야.’

폭넓게 유능한 인재를 찾고, 각계각층 인사를 두루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게 대통령의 ‘의무’라는 건 너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높은 담에 둘러싸인 역대 대통령들이 가장 하기 힘들었던 게 바로 그런 당연한 임무였다. 김 대통령이 굳이 노트에 이 항목을 적은 이유가 여기 있으리라 본다.

집권 3년차에 들어선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골든크로스를 지났다거나 머지않아 30%대까지 추락할 것이라는 말들이 쏟아진다. 어려움 속에서 정확하게 앞으로 나가려면, 발밑의 돌부리를 살피고 허벅지를 할퀴는 가시덤불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그래도 눈은 저 멀리 가야 할 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현실을 정확히 읽되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

어찌 보면 지금 상황은 20년 전의 김대중 정권과 비슷하다. 남북 문제에서 획기적 진전을 이뤘지만 아직 갈 길은 멀고, 경제에선 구제금융 때와 비교할 순 없지만 구조적이고 지난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얼마 전 그 시절을 다룬 <국가부도의 날>이란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가장 암울한 시기였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우리는 분명히 한걸음 전진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斥竿頭 進一步). 백척 높이의 장대 끝에서 용감하게 한걸음 내디뎌야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진보’(進步)란 그런 것이다. 어렵다고 해서 이제까지 지나온 과정을 답습하는 건 ‘보수’의 길이다. 진보는 말 그대로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번째 진보정권의 삼년차 ‘진일보’를 기대한다. pcs@hani.co.kr

<대통령 수칙 15개 항>

1. 사랑과 관용, 그러나 법과 질서를 엄수해야

2. 인사정책이 성공의 길이다. 아첨한 자와 무능한 자를 배제

3. 규칙적인 생활, 적당한 운동, 충분한 휴식으로 건강을 유지

4. 현안 파악을 충분히 하고 관련 정보를 숙지해야

5. 대통령부터 국법 준수의 모범을 보여야

6. 불행한 일도 감수해야 한다. 다만 최선을 다하도록

7. 국민의 애국심과 양심을 믿어야 한다. 이해 안될 때는 설명방식을 재고해야

8. 국회와 야당의 비판을 경청하자. 그러나 정부 짓밟는 것 용서하지 말아야

9. 청와대 이외의 일반 시민과의 접촉에 힘써야

10. 언론의 보도를 중시하되 부당한 비판 앞에 소신을 바꾸지 말아야

11. 정신적 건강과 건전한 판단력을 견지해야

12. 양서를 매일 읽고 명상으로 사상과 정책을 심화해야

13. 21세기에의 대비를 하자.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명심해야

14. 적극적인 사고와 성공의 상(像)을 마음에 간직

15. 나는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같이 계시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찬수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