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21 08:26
수정 : 2019.01.2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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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이낙연 국무총리(왼쪽)와 황교안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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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이낙연 국무총리(왼쪽)와 황교안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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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이후만 보더라도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이한동 고건 이해찬 정운찬 등 부지기수다. 그러나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이는 없다. 왜 총리 출신 인사들은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걸까.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지난주 자유한국당에 입당했다. 2022년 대선을 향한 본격적 정치행보의 시작이다. 여론조사에선 야권 대선 주자 가운데 압도적 1위를 달린다. 여권에선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지율 1위에 올라섰다. 여당에선 현직 총리, 야당에선 전직 총리가 떠오르는 흥미로운 양상이다.
총리 출신이 유력 대통령 후보로 각광받은 건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이후만 보더라도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이한동 고건 이해찬 정운찬 등 부지기수다. 그러나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이는 없다. 해방 이후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에 오른 이는 최규하씨가 유일하다. 최씨는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뒤 8개월 남짓 그 자리를 승계했다. 정상적인 청와대 입성이라 보기 힘들다. 왜 총리 출신 인사들은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걸까.
지금은 달라졌지만, 과거엔 국무총리를 ‘방탄 총리’ ‘얼굴마담 총리’라 부르곤 했다.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처하면 국무총리를 갈아치움으로써 국면 전환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국회 청문회 통과를 걱정해야 하는 요즘엔 대통령이 총리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2014년 정홍원 총리는 세월호 참사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후임 총리 지명자가 잇따라 낙마하는 바람에 10개월 가까이 더 총리직을 수행했다. 이런 흐름이 총리 위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권위주의 시절엔 총리가 대통령의 ‘정치적 방패막이’ 구실을 했지만, 이젠 모든 정치적 책임이 대통령을 향하고 총리는 오히려 한발 비켜서는 정반대의 형국이 되어버렸다. 권력 2인자인데 정치 공방에선 자유로운 상황, 국무총리의 높은 지지율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위상이 달라졌어도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닌다. 대통령은 내각을 잘 관리하고 자신을 보완해줄 안정감 있는 인사를 대개 총리로 고른다. 대중적 카리스마와 정치력은 총리 발탁의 핵심 요소가 아니다. 물론, 총리를 지내면 장관이나 국회의원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인지도와 영향력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총리 자리가 만들어준 것일 뿐이다. 총리의 영향력을 개인의 정치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착각이다.
전·현직 총리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스스로의 힘으로 세력을 쌓은 정치인은 청와대로 가는 험로를 ‘자기 사람들’과 함께 헤쳐나갈 수 있지만, 총리라는 배경에 끌린 이들로 구성된 캠프는 고난을 견디는 데 취약하다. 지지율 등락에 쉽게 무너져버린다. 과거 국무총리 출신의 유력 대선 주자들이 대부분 중도 포기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을 이끌 정치적 비전과 이상을 지녀야 하는데, 국무총리에겐 이걸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뽑은 총리는 현직 대통령의 지향과 정책기조를 그대로 따라갈 순 있지만, 그걸 뛰어넘는 자신만의 비전을 내놓기란 매우 어렵다. 아마도 유일한 예외가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씨일 것이다. 이회창 전 총리는 계파 정치, 측근 비리와 단절한 ‘깨끗한 정치'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국민의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 들어와선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민주계(김영삼계)보다 훨씬 구태에 찌든 티케이(TK) 민정계와 손을 잡았기에 대통령 도전에 실패했다.
자신을 발탁한 대통령을 뛰어넘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현직 대통령과 틀어지지 않는 것, 이것이 국무총리 출신이 청와대에 다가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가기란 백척 절벽 끝에 달린 촉나라 잔도를 걷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황교안 전 총리는 입당 기자회견에서 국정을 결딴낸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에 뚜렷한 대선 후보가 눈에 띄지 않고 박근혜 지지세력이 작지만 단단한 현실이 황 전 총리에겐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현 정부의 안정적 2인자인 이낙연 국무총리 역시 문재인 대통령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줄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총리 출신 인사들은 ‘통합’ ‘안정’ ‘새로운 정치’와 같은 두루뭉술하고 무색무취한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현직에 있을 때 국민에게 보여주지 못한 능력을 퇴임 뒤에 정치에 뛰어들어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사실 환상에 가깝다. 우리 정치에 ‘총리 거품’이 너무 많이 낀 거 같다.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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