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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3 14:51 수정 : 2019.02.13 19:04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심각한 헌정질서 부인 행위이며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세 국회의원 발언에 보수언론이 왜 그런 식의 대응을 하는지 궁금하다. 지지율을 까먹는 자유한국당 실수가 허탈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내년 총선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안타까움만 묻어난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보수진영’이 화들짝 놀랐다.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세 국회의원의 5·18 모독 발언이 보수 전체를 들쑤셔 놓았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당내 의견’이니 ‘다양한 역사해석’이니 하는 궤변으로 넘어가려다 보수 내부의 거센 비난 앞에 결국 세 의원을 당 윤리위에 회부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을 쏟아내던 보수 언론들은 이번엔 총구를 자유한국당으로 돌렸다. 분위기도 좋고 전당대회를 통해 보수 결집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왜 이런 ‘악수’로 지지율을 까먹느냐고 질타했다. 보수 명망가들조차 ‘5·18 북한군 개입설’은 철지난 음모론이라며 김진태 의원 등과 선을 긋고 있다.

자, 이제 망언을 한 세 국회의원을 적당히 징계하고, ‘5·18은 민주화운동이며 북한군 개입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사과문을 내면 모든 게 끝나는 걸까.

그러나 이 사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은 12일 “(세 의원의 주장이) 일반적 역사해석의 차이를 넘었다”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가리켜 ‘헌정질서 문란 행위자’라고 비난했지만, 이런 태도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다. 1990년 1월, 5공 군부독재를 계승한 민정계와 민주화운동을 했던 민주계(김영삼계)의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이 자유한국당의 뿌리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몸속에 흐르는 독재의 피가 정화되지 못했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북한군 개입’과 같은 허무맹랑한 주장은 아닐지라도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광주 무력진압이 1980년 봄의 혼란한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북한에 맞서 ‘자유 질서’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정치행위였다는 해석은 보수 본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비교적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 ‘광주’는 정치적 약점일 뿐,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빛나는 자산이란 인식은 약하다. 이런 기류 속에서 정치적 상황이 좀 나아진다 싶으면 부지불식간에 비집고 표출되는 게 바로 김진태식 언행이다.

한번 돌아보자. 노태우씨가 회고록에 “5·18 진범은 유언비어”라고 적은 것이나 전두환씨가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회고록에 표현한 건, 그들이 ‘광주학살’의 주범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07년 대통령 예비후보 시절 광주를 방문했을 때 ‘5·18 사태’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내내 사용했다. ‘광주사태’는 1980년대 군부정권이 5·18을 ‘폭동’으로 색칠하고 무력진압을 합리화하기 위해 썼던 용어다. 8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더구나 그 기반 위에서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단어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엔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해 제창할 것인지 여부가 여야 청와대 회동에서 논란이 됐다. 당시 우상호 민주당·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독립군 후손에게 독립군가를 부르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해달라고 박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좋은 방안을 찾도록 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 국가보훈처는 기념곡 지정을 거부했다. 대통령의 묵인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유한국당 출신 대통령들의 5·18 인식이 이런 걸 보면, 일부 국회의원들이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독버섯은 습한 환경과 고사목 지대가 있어야 피어나는 법이다.

자유한국당 주변엔 비슷한 생각을 하는 보수세력, 정확히는 보수를 가장한 ‘극우세력’이 좀더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만약 여당 국회의원이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발언했다면, 보수언론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이적행위’니 ‘헌정질서 부정’이니 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맞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그런데 헌정질서 부인 행위이며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세 국회의원 발언엔 왜 그런 식의 대응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지지율을 까먹는 자유한국당 실수가 허탈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내년 총선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안타까움만 배어 있을 뿐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한국 정치에선 ‘진보 대 보수’의 구도가 자리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구도에선 더불어민주당도 ‘진보 블록’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5·18 망언 파동을 보면, 진보-보수 구도로 슬쩍 덮었을 뿐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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