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7 18:19
수정 : 2019.03.27 19:16
|
‘환경부 표적 물갈이’ 의혹으로 수사를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2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 법정으로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대통령제’라는 정치제도 아래서 대통령의 가장 핵심적 권한인 인사권이 검찰과 법원의 손바닥 위에 놓이는 상황은, 여야 정쟁이 극한으로 치달았다는 징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
‘환경부 표적 물갈이’ 의혹으로 수사를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2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 법정으로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26일 새벽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출입기자들에게 이런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 앞으로 장관의 인사권과 감찰권이 어디까지 적법하게 행사될 수 있는지, 법원이 그 기준을 정리할 것으로 기대한다.”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면 검찰의 칼날이 청와대를 헤집었을 것이다. 또 대통령과 장관의 인사권은 ‘직권남용’이란 그물에 걸려 심각한 제약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영장을 기각한 법원 결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예 ‘적법한 인사권의 범위’까지 잘 정리해주길 바라는 청와대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적절한 것일까. ‘대통령제’라는 정치제도 아래서 대통령의 가장 핵심적 권한인 인사권이 검찰과 법원의 손바닥 위에 놓이는 상황은, 여야 정쟁이 극한으로 치달았다는 징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민심을 얻으면, 못 할 게 없다. 민심을 잃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따라서 민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자가 법을 제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자보다 위대하다”고 말한 건,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일깨우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낙하산 인사’라는 정치적 논쟁거리를 형사법으로 재단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는 건 좋든 싫든 선거를 치르는 대통령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미국에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7천여개의 자리가 새로 채워진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이전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근무했던 인사는 “대통령이 인사에 개입할 수 있는 자리는 전부 합치면 3만개쯤 된다. 이 중에 민정수석실이 검증에 나서는 자리는 3천개 정도 된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사람을 바꾸는 건, ‘자리’를 단지 선거라는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spoils)으로 생각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정부를 채워야 정권이 성공한다는 ‘정치적 믿음’이 깔려 있다.
이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이냐를 두고 대통령제 역사만큼이나 긴 논쟁이 이어져왔다. 전후 미국 정치에서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로널드 레이건 시절의 백악관 인사원칙 첫번째는 ‘레이건에 대한 철학적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장기적으로 보면 정치적으로 발탁한 사람보다 직업공무원의 정책 성과가 훨씬 높고 특히 위기상황에서 이런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고 말하는 정치학자도 많다.
대통령과 장관의 인사권 행사가 ‘권한을 넘어섰는지’ 따지는 검찰 수사와 법원 심리에선 이런 논쟁의 배경과 의미는 여지없이 무시된다. 오직 관행이냐 아니냐, 관행이더라도 직권남용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좁은 형사법의 잣대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도 법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통령의 핵심 권한의 범위는 국민 합의를 거쳐 정해야지,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맡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대통령의 모든 결정은 선거라는 민의의 심판을 받기 전에 사법적 판단부터 먼저 구하는 게 안전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이렇게 반문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사권은 왜 그렇게 난도질했는가. 박근혜 정부 문화부의 블랙리스트와 문재인 정부 환경부의 리스트는 뭐가 다른가.” 그러나 국민의 위임을 받지 않은 최순실씨 같은 민간인이 관세청장 임명을 주도한 것과,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공직 라인에서 인사권을 행사한 건, 본질적으로 출발선이 다르다. 정치적 신념을 이유로 시민의 기본권을 제약한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와, 정무직 공직자의 진퇴 문제를 다룬 환경부 ‘리스트’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미국은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4년마다 한번씩 의회에서 ‘플럼 북’이란 정부 고위직 리스트를 작성해 배포한다. 2016년에 나온 플럼 북엔 7천개의 연방정부 정무직 자리가 담겼다. 이 자리만 대통령이 임명하고 나머지는 건들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말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검찰이 아닌 국회가 나서는 게 맞다. 한국판 ‘플럼 북’이든 새로운 공직 임용규정이든 국회가 만들어서 실행하는 게, 검찰 손에 정치적 판단의 칼을 쥐여주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검찰의 칼날은 여든 야든 결국 자신의 목을 찌르는 데로 돌아오고, 칼자루를 쥐어야 할 국민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상황으로 귀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