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29 17:34
수정 : 2019.05.3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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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현직 외교관의 기밀 유출사건과 관련해 “공직자의 기밀 유출에 대해 국민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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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현직 외교관의 기밀 유출사건과 관련해 “공직자의 기밀 유출에 대해 국민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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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논설위원실장
대통령제라는 정치제도 아래서 대통령과 관료의 ‘갈등’은 어쩌면 숙명적이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행사에 참석했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시절, 워싱턴에 회자됐던 재밌는 말이 있다.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opponent)는 민주당이지만 대통령의 적(enemy)은 정부 내부에 있다.” 부시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중앙정보국과 국무부 관료들이 하도 내부 정보를 언론에 흘리니까 나온 말이었다.
2주 전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의 대화가 논란이 됐다. “정부 관료가 말을 덜 듣는다.”(이인영), “진짜 (정부 출범) 2주년이 아니라 4주년 같다.”(김수현)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나눈 두 사람의 대화는 공무원을 바라보는 청와대와 여당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열흘 뒤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이 한-미 정상의 통화 내용을 강효상 의원에게 유출한 사건이 터졌다. 현직 외교관이 3급 기밀인 정상 통화 내용을 외부로 유출한 건 외교부 개청 이래 유례없는 일이었다. 정말 공무원들의 ‘반개혁 기류’가 복지부동을 넘어 야당에 기밀 정보를 빼돌리는 수준에까지 이른 걸까.
역대 어느 정부든지 청와대와 부처 공무원들 사이엔 늘 긴장과 갈등이 존재했다. 물론 문재인 정부 들어서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 공무원들의 관계가 좀 껄끄러운 것처럼 비치는 측면은 있다. ‘너무 오래 지속되는 적폐 수사’를 많은 이들이 이유로 든다. 그런 영향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는 그리 크지 않다. 정부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직사회의 ‘과거 청산’ 작업이 없었던 적은 없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명박 정부 때 일한 사람을 많이 배제했다. 이보다는, 현 정부 출범 때 인수위 기간이 없어 핵심 정책을 (청와대와 부처 공무원들이) 공유할 시간이 없었던 탓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급격한 정책 변화를 추구했는데, 과거 정권의 정책순위에 얽매인 관료사회는 이걸 뒷받침하고 집행할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다는 얘기다.
대통령제에서 국정 방향을 수립하고 이끌어가는 건 청와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책을 현실에 안착시키는 ‘기술’을 가진 게 관료들이란 걸 부인하긴 어렵다. 공무원들이 부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통령 국정운영의 성공을 위해 움직이도록 하는 게 매우 중요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전후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로널드 레이건은 직업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정책 지향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공유하는 게 정권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시대는 지났다.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1990년대까지는 공무원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곧 자신의 공직 철학이라 여기고 이걸 실천하는 게 ‘애국’이라 생각했다. 이젠 다르다.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과, 공직을 ‘평생직장’으로 삼고 들어온 관료들의 생각을 일치시키기란 좀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정책 주도권을 정부 부처에 넘기고 관료들이 좌지우지하도록 하는 건 옳지 않다. 부처 이해에 기반한 관료와, 선거에서 지지한 다수 국민의 요구를 중시하는 청와대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방법은 두가지다. 우선, 관료를 이끌어 업무를 장악할 수 있는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해 대통령 뜻이 정확하게 부처에서 집행되도록 해야 한다. 장관은 대통령의 철학을 부처에 스며들게 하는 최전선의 공직자이지 ‘얼굴마담’이 아니다. 둘째로, 대통령이 공무원들과의 스킨십을 늘릴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면서 동시에 ‘행정부의 수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를 둘러싼 한-일 무역소송에서 승리한 산업통상자원부 분쟁대응 팀의 여성 사무관이 얼마 전 결혼했다. 그 결혼식장에 대통령의 축하화환이 온 게 세종시에선 작은 화제가 됐다. 젊은 공무원들이 ‘촛불 정부’ 탄생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서기관 또는 사무관 특강을 통해 대통령의 생각이 부처 밑바닥에 흐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현직 외교관의 기밀 유출을 ‘기강 해이’라고 질타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이번 사건을 관료사회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뿐 아니라, 열의를 갖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계기로 삼는 게 중요하다.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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