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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간과동물

“벨루가는 내 영혼의 동물이야”

등록 2017-08-01 15:27수정 2017-08-31 00:30

[애니멀피플] 북극곰의 나라에서
“나는 벨루가라는 하얀 고래를 좋아해.”
그 한 마디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웃는 얼굴의 벨루가
웃는 얼굴의 벨루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자 방송국에 들어갔다. 가끔은 밤을 새우고, 가끔은 남들 일하는 대낮에 퇴근하기도 하며 나름 열심히 살았다. 때론 재미있기도, 힘들기도, 아주 가끔은 뿌듯하기도 한. 딱히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그렇기에 굳이 읊자면 짠내 나는 대한민국 직장인의 삶이었다.

발붙이고 살면서도 문득문득 낯설어지는 서울에서 여느 때처럼 습관성 외로움에 젖어 고향 집 노견을 향한 견비어천가를 읊던 어느 저녁이었다.

“저는 정말 개를 좋아해요. 우리 개는 특히.”
“나는 벨루가라는 하얀 고래를 좋아해.”

네? 무슨 고래요? 나는 조금 당황했다. 개를 좋아한다는 말에 난데없이 웬 고래로 답하다니. 보통은 고양이나 햄스터쯤이 나오기 마련 아닌가? 아니, 고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종종 봤지만, 돌고래나 범고래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흰 고래를 좋아한다는 건 꽤 당혹스러운 답이었다. 때는 한국에서 벨루가(흰고래)가 유명해지기 전. 대다수 한국인에게 벨루가는 생소한 이름이었고 고래에 일가견이 없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벨루가는 내 영혼의 동물이야.”

그때였다, 난생처음 들은 흰 고래가 내 마음에 새겨진 것은. 영혼의 동물이라, 아 정말 멋진 단어조합이 아닌가. 그 존재를 알려준 이의 신뢰도에 비례해, 낯선 고래는 내 안에 꽤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무려 ‘영혼의 동물’이라는 신비한 감투를 쓰고.

벨루가와 북극곰의 마을이라…

처음에는 그저 궁금했다. 뭐가 특별하기에 유독 그 고래가 좋은 걸까. 흰색이라서? 희귀해서? 도대체 어떤 동물이면 ‘영혼의 동물’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 거지. 그건 영험한 동물이라는 뜻일까, 영혼을 치유해 주는 동물이라는 뜻일까.

이후 심심할 때마다 검색하던 비행기 표 대신 벨루가를 찾기 시작했다.

온몸이 새하얀 고래, 추운 북쪽 바다에 산다는 것, 그래서 이름도 러시아어 벨루가(Beluga)이며, 얼핏 돌고래(Dolphin) 같지만 엄연히 고래(Whale)로 분류된다는 것 등.

전세계 북극곰의 수도 ‘처칠‘은 매년 11월이면 바다가 언다.  이태리 제공
전세계 북극곰의 수도 ‘처칠‘은 매년 11월이면 바다가 언다. 이태리 제공

그렇게 광활한 정보의 바다에서 벨루가를 좇아 헤엄치던 어느 날. 한 동영상을 발견했다. 새하얀 벨루가 무리가 수중카메라를 연신 쫓아오며 툭툭 장난을 치다가, 한 녀석이 빤-히 카메라를 쳐다보는데 그 표정이 꼭 씨익 웃는 아이의 얼굴 같았다. 아니, 그 고래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 잊을 수 없는 영상의 말미에는 북극곰의 수도 (Polar Bear Capital of the World)라는 글귀가 나타났다. 북극곰과 벨루가의 마을이라. 그 오묘한 두 단어의 힘으로 캐나다 시골 마을 처칠은 내 해묵은 버킷리스트의 맨 윗줄에 자리 잡았고, 웃는 고래의 얼굴은 영혼의 동물’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수식어와 함께 내 안에서 멋대로 재해석되어 막연한 행운의 상징이 되어갔다. 일종의 부적처럼.

‘너를 만나면 내 영혼도 치유 될까?’
본 적도 없는 고래에게서 나는 어느새 희망을 찾고 있었다.

창살 너머로 만나면 슬퍼질 것 같았다

곧 여수와 제2롯데월드 등 국내 아쿠아리움에도 잇따라 여러 마리의 벨루가들이 입성했지만, 찾지 않았다. 서식지가 위협받아 자연 상태에서 살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동물은 본래의 자리에서 사는 게 낫다고 믿기에. 좁은 수조에서 수영조차 제대로 못 하는 벨루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았고, 희망의 이름이 된 벨루가를 투명한 창살 너머로 만난다면 매우 슬퍼질 것 같았다.

그러던 2015년, 나는 방전 되었다. 원했던 일을 하고 있는데도 처음의 열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목적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무언가 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살게 하던 내 안의 불꽃이 꺼져가는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원인도 몰랐으니 해결책은 더 몰랐다. 숨이 죽어버린 열정은 혼자 아무리 부채질하고 장작을 쑤셔도 회생시킬 수 없었다. 없는 게 없는 도시 서울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가만히 있다간 바짝 말라 육즙도 안 남은 번데기가 될 듯한 위기감에 친구 따라 생전 안 가던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갔을 때, 돌팔이 친언니가 안주 삼아 사주팔자를 풀어줬을 때. 놀랍도록 같은 풀이가 나왔다. 내 팔자에 그간 까맣게 모르고 산 무슨 귀인들이 그리도 많으시다는데 하필 지금 있는 곳, 안정적인 땅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향후 몇 년간 해외에서 유독 운이 트여있다고. 믿거나 말거나.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이른바 ‘불쏘시개 찾기 여행’.

세상을 걷다 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이 되었든 땔감이 되었든, 기름이 되었든. 꺼져가는 내 안의 불씨를 살릴 귀인 하나쯤은. 아니, 찾아내야지!

그렇게 북미를 시작으로 2년 여간 세계를 떠돌 계획을 세웠을 때, 첫 번째 목적지로 처칠이 떠오른 건 말하자면 입 아픈 일. 벨루가와 희망이 어느새 같은 단어가 되어 있던 나는 곧장 캐나다행 비행기 표와 처칠행 기차표를 끊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전부를 이 손바닥만 한 북쪽 마을에서 보내게 되리라는 건, 패기 넘치던 당시의 나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태리 북극곰 수도 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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