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의 끝에는 처칠이 있다. 북극곰의 수도, 벨루가가 찾아오는 곳. 처칠/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마침내 익숙했던 모든 것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2016년 여름.
처칠로 가기 전 밴쿠버에 잠시 묵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장 살기 좋은 곳’ 순위에 매해 이름을 올리는 도시답게 여름의 밴쿠버는 실로 아름다웠다.
마지막 저녁, 숙소 앞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길 때였다. 대화를 나누던 밴쿠버 사람이 정말이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상에. 처칠에 간다고요? 거길 왜 가요, 이 여름에?”
북극곰도 없을 때, 이 좋은 밴쿠버를 두고 그 시골에는 대체 왜 가냐는 그 물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진하게 담겨있었다.
“왜냐면, 거기에 내 영혼이 있거든요.”
한층 더 수상한 말을 남기고 나는 기차를 타러 떠났다. 나도 모르는 내 영혼을 쥐고 있는 벨루가를 만나러!
91시간의 설국열차
캐나다 중부 매니토바 주의 북쪽 끝. 땅이 끝나고 드넓은 허드슨 만이 시작되는 곳에 처칠이 있다. 도로가 끊겨 오로지 기차와 비행기로만 오갈 수 있는 곳. 비행기는 북극권 항공사라 몸값이 비싼 하늘 길 대신 많은 자유여행객이 기차를 이용한다.
밴쿠버에서 처칠까지는 꼬박
엿새가 걸렸다. 위니펙까지 2박3일을 달린 후, 처칠을 향해 2박3일을 다시 달린다. 끝이 안 보이게 길었던 밴쿠버발 열차는 위니펙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튼 후, 단 세 칸으로 짧아졌다. 대다수 승객의 머리맡에는 같은 목적지가 적혀 있었다.
이 열차의 마지막 종착지, 처칠(Churchill).
북쪽으로 달릴수록 창밖의 나무들은 키가 줄어들고 잎이 뾰족해졌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툰드라 지대에 접어들었을 때, 이 설국열차를 세 번이나 탄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이게 마지막 길이야. 보라색 꽃이 나타나면, 도착한 거야.”
그 덕에, 처칠은 내게 보라색이 되었다.
환영합니다, 여기는 북극곰 마을!
서울에서 비행기를 세 번 타야 닿는 땅. 처칠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눈앞의 풍경이 ‘북극곰 마을’이 아니라 웬 사막 같았기 때문이다. 좁은 도로를 제외한 땅 대부분은 속살을 그대로 드러냈고,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초록빛 식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사방에 흙먼지가 곱게 피어올랐다. 그 황량한 여백에 듬성듬성 놓인 단층 컨테이너 건물들은 순박하게 존재를 과시했다. 아무리 북극권이라지만, 앙상한 툰드라 나무마저 손에 꼽다니! 오로라가 보이는 북쪽 마을이라고 해서 아이슬란드처럼 알록달록 예쁜 모습을 상상하고 왔다면 당장 집에 가고 싶어질 풍경이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벨루가만 있다면 풀 한 포기 없어도 상관없는 나는 씩씩하게 쏟아지는 우박을 뚫고 가게로 향했다. 마을 끝에는 내가 한 달 간 지낼 아늑한 통나무 건물이 있었다. 아니. 한 달 간 ‘일 할’ 곳이.
역을 나와 처음 처칠을 마주했을 때, 조금 놀랐다. ‘북극곰 마을’의 풍경이 꼭 사막 같았기 때문이다. 처칠/남종영 기자
마을 뒤에는 허드슨만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태리 제공
처칠에 가능한 오래 머물면서 두고두고 벨루가를 만나고 싶었던 나는, 궁리 끝에 여행자 팔자에 없는 일자리를 구했다. 어떤 일인지, 시급은 얼마인지 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 이상한 구직자의 유일한 조건은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벨루가를 만나기 용이할 것’. 고민 끝에 낙점된 곳은 레스토랑과 호텔, 그리고 투어상품을 함께 운영하는 가게였다. 숙소가 제공되고, 직원은 무료로 몇 번이고 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문의를 하자마자 바로 채용이 확정됐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만 같았다. 역시 벨루가는 행운의 상징이었을까?
불쏘시개 찾기 여정은 첫 단추부터 순조롭게 끼워지는 듯 했다.
가게는 아늑하고 멋졌다. 이국적인 느낌을 한껏 뽐내는 레스토랑에서 내 인생 첫 번째 북극곰 가죽을 만나고, 앞으로 지내게 될 집을 안내받았다. 통나무 가게와 더불어 내 처칠 생활의 전부가 될, 푸른 집. 어찌 알았는지, 집주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해리포터의 맥고나걸 교수처럼 나를 꿰뚫어보던 새카만 양반은 이내 새 세입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벌러덩 입주 허가를 내줬다. 그리곤 내 다리에 온 몸을 문지르며 애정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세상에, 한국에서도 못 받은 길냥이의 간택을 북극 오자마자 받다니! 나는 점점 밑도 끝도 없는 확신에 차올랐다. 여기는 내 운명의 땅이 분명해. 점괘에서 말하던 귀인이 있다는 곳, 바로 여기야!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천생천살, 이유 없는 행복에는 언제나 이유 없는 불행도 함께 따른다는 인생의 진리를. 앞으로 어떤 불행이 닥칠지는 까맣게 모른 채, 그렇게 나는 벨루가의 마을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태리 북극곰 수도 거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