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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4·3상처 싸맨 한평생 그리며

등록 2008-03-25 19:03

4·3상처 싸맨 한평생 그리며
4·3상처 싸맨 한평생 그리며
‘무명천 할머니 삶터’ 개소
역사 되새기는 공간으로
할머니가 살아나온 것만 같았다. 턱에 무명천을 싸맨 채 햇볕이 드는 울담 곁에 쪼그려 앉아 있는 듯 했다. 생전에 수십년 동안 고 진아영 할머니를 알고 지낸 할머니들이 하나 둘 흐느끼기 시작했다. 진 할머니의 방에 틀어놓은 비디오에서 생전의 모습이 나오자 방 한 구석에 쪼그려 앉은 임승옥(83)할머니는 “아이고, 눈물 남수다”라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25일 낮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고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에서는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위원회’(공동대표 박용수 정민구) 주최로 ‘무명천 할머니 삶터’ 개소식이 열렸다. 진 할머니는 제주4·3사건 당시 무장대로 오인한 경찰의 총에 턱을 맞아 한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싸매고 살다가 90살 나이로 2004년 9월 생을 마감했다.

그의 한많은 생애를 안 지역의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 회원들이 뜻을 모아 진 할머니의 삶터를 보존키로 하고 한달 남짓 자원봉사 끝에 이날 진 할머니가 살던 집을 새로 단장하고 문을 열였다. 생가에는 ‘진아영’이라고 쓰인 문패가 선명하게 걸렸고, 조그만 마당에는 잔디가 곱게 깔렸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이시 줄을 누게가 알아수과(있을 줄을 누가 알겠습니까). 살아실 때는 외롭게 살았는데, 돌아가시니 이렇게 기쁜 날도 있는 줄이야.” 고 진아영 할머니의 조카 진순심(76)씨는 눈물을 머금은 채 생가에 연신 합장했다.

이날 삶터 개소식에 참가한 할머니들은 조그만 생가 주변을 둘러가며 꽃잎 하나라도 다칠새라 조심조심 꽃을 심어나갔다. 마치 손길이 진 할머니의 손을 부여잡는 듯 했다. 생전의 모습대로 복원한 진 할머니의 삶터에는 그가 생전에 쓰던 이불과 젊었을 적 사진, 이불, 옷걸이에 걸어놓은 한복, 그리고 부채와 등긁개, 파리채 등이 고스란히 놓여 있어 그를 알던 할머니들의 눈시울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그 놈의 시절이 어떤 놈의 시절이었는지…” 개소식에 참석해 진 할머니의 삶터를 돌아보던 한 할아버지가 쓴 소리를 한마디 내뱉었다.

부엌에는 솥단지와 냄비 몇개, 마침 점심시간을 맞아 금방이라도 차렸음직한 조그만 밥상이 하나 놓여 있고, 허영선 시인의 시 ‘무명천 할머니’와 양미경(전시기획 담당)씨가 진 할머니의 얼굴을 그린 천에 일일이 바느질로 덧댄 작품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날 부엌에서는 그의 그림을 영정삼아 조카와 친지들이 조그만 젯상을 마련해 예를 갖추기도 했다.

이날 젯상에 흐느끼며 술잔을 올린 김승애(75)씨는 “할머니 얼굴 사진을 보니 마치 살아 나올 것만 같다”고 했고, 송인순(82)할머니는 이번 생가를 복원한 보존위원회 쪽에 “이렇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너무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삶터 보존위원회 정민구·박용수 공동대표는 “거창한 역사공간이 아니라 너무나 소박하게 살아오셨던 할머니의 삶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으로 만들려 했다”며 “할머니의 삶터가 방문자들한테 4·3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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