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전국일반

지리산자락 층층논에 새긴 ‘농부의 반백년’

등록 2011-04-24 20:15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서리 남동마을 이춘석씨가 산비탈에 일군 자신의 다랑논에 앉아 먼 산을 보고 있다.(위) 다랑논의 모습.(아래)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서리 남동마을 이춘석씨가 산비탈에 일군 자신의 다랑논에 앉아 먼 산을 보고 있다.(위) 다랑논의 모습.(아래)
현대사 곡절속 피아골 지켜
3년전 큰 수술·허리병에도
“논 묵혀두면 우울증 온다”
아들들에 이전한 땅 ‘소작’

“꼼지락거려봤자 밥벌이도 안 되지만, 논을 묵혀 놓으면 우울증이 오지요.”

지리산 피아골에서 지난 21일 만난 이춘석(86·전남 구례군 토지면)씨는 지금도 다랑논 농사를 놓지 못하는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집 앞 큰 산 비탈 사이사이로 펼쳐진 다랑논들이 눈에 들어왔다. 궁벽진 산속 경사진 비탈에 돌을 쌓아 석축을 만들고 농토를 일궜던 이는 누구였을까? 한 뼘의 땅이라도 넓히려고 땀 흘려 괭이질을 했던 노동의 산물처럼 보였다.

이씨는 올해도 다랑논 여섯 마지기를 짓는다. 볍씨를 물에 담근 뒤 싹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20일)를 넘겨 점차 바빠질 때다. 볍씨에 싹이 트면 다랑논에 못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부인(71)과 막내의 도움으로 초벌갈이도 끝냈다. 15년 전까진 소가 없으면 논을 갈 수가 없었지만, 농기계가 황소의 노동을 대신한다. 3년 전 큰 수술을 받은데다 허리까지 좋지 않아 지팡이가 없으면 불편하지만, 다랑이 논두렁을 떠나지 못한다.

“이 골짜기를 벗어났으면 새끼들을 더 가르쳤을랑가 모르겄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다랑논 두 마지기가 전부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던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소집영장 받고 떠나던 날 해방을 맞았고, 한국전쟁 때도 지리산 좌우 갈등 속에서 무수하게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경찰서에 근무했는디 휴가를 받아 왔다가 그만 부모들한테 붙들려갖고 사표를 내버렸제.” 두 동생들이 입대한 뒤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40살 때 다시 농사를 시작한 이씨는 송아지를 키우고 담배 농사도 지어 한때 논을 열다섯 마지기까지 불려가며 6남매를 키웠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잘했던 둘째를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이 걸린다”며 먼 산을 바라봤다. “밥 먹고 살기도 힘들던 때요, 그때가. 여그서 중학교 간 놈도 없었응께….”

이씨는 “힘이 부쳐 논을 팔아불고, 남은 것도 아들들 앞으로 이전해줘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장남(57)과 차남(48)은 부재지주여서 한국농어촌공사 산하 농지은행에 임대를 위탁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부재지주가 이행강제금을 물지 않고 농지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다. 이씨는 3년 전 농어촌공사에 10만원의 ‘사용대’를 낸 뒤 아들들의 논을 5년 계약으로 임대했다. 구례의 5000여㏊ 농지 가운데 100여㏊가 임대 수탁 농지다. 이씨는 “아들들한테 소작하고 있는 셈”이라며 빙긋이 웃었다. 이씨는 다랑논 한켠에 묏자리를 마련해 놓으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인자 얼마나 더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제….”

구례/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인기기사>

펜션서 수십명 콜센터처럼 전화 선거운동, 엄기영은 ‘몰랐다’ 해명
서태지의 배신? 정현철의 소신?
아이폰 이어…안드로이드폰도 당신을 미행했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 “장교 살생부 명단 21명”
3만명 속았다…일제 강제동원 보상 사기극
노동자 ‘벼랑’ 내모는 손배·가압류 1000억
“4대강 공사에 올 농사 죽쑬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1.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2.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3.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4.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5.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