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1950년대로 추정되는 시기에 제주 해녀들이 옛 해녀복인 ‘소중의’를 입고 물질에 나서고 있다. 일제 강점기 제주 해녀들은 일본은 물론 중국의 웨이하이·칭다오·다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나가 물질을 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100년사> 발췌
이지치 교수 논문서 확인…일·중국 등서 군수물자 채취
일제 강점기 제주도 해녀들이 군수용 물자의 채취 등 일본 제국주의의 전시체제에 동원됐으며, 일본에서 생존권 옹호를 위한 해녀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사실은 최근 제주발전연구원이 펴낸 <제주여성사-일제 강점기>에 일본 에히메대학의 이지치 노리코 교수가 쓴 ‘국외 출가 해녀’라는 논문에서 공개됐다.
논문을 보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해녀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주로 군수용으로 필요한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데 동원됐다. 일본 하치조섬에서 ‘물질’(바닷속에서 패류 등을 채취하는 일)을 했던 해녀들은 1938년부터 전복이나 오분자기의 채취가 금지돼 우뭇가사리만 채취했다.
규슈 구마모토현의 한 지역에서는 1940년 “군수용으로 절대 필요하고, 수요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기 위해 임금이 싼 해녀 30명을 고용했고, 그 이듬해에도 50명의 해녀를 고용했다. 당시 우뭇가사리는 비행기의 날개 부분에 색을 입히거나 가죽제품의 마무리제, 화약제조용 고정제(접착제) 등 군수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제주 해녀들이 일본 전시체제에 동원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제주 해녀들이 노동 착취나 차별에 맞서 해녀투쟁을 벌였던 사실도 밝혀졌다. 이즈열도 미야케섬에서 해녀 40여명이 인솔자가 사업 부진으로 임금을 주지 않자 파업을 벌였으며, 시즈오카현 아타미에서도 해녀들이 임금 체불에 항의한 끝에 임금을 받아내는 등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했다고 이지치 교수는 밝혔다.
제주 해녀들은 1903년부터 외부로 나가기 시작해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 전역과 중국의 웨이하이·칭다오·다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물질을 했다. 1938년 중국 칭다오에서는 제주 해녀 28명이 물질을 했다.
이지치 교수는 1934년 제주섬 밖으로 진출한 해녀 5000여명이 70만엔의 소득을 올린 반면, 제주섬에서 물질한 해녀는 5300여명이 8만~27만엔의 수입을 올려, 외지 진출 해녀들의 소득이 제주섬의 경제를 좌우할 만큼 규모가 컸다고 분석했다.
이지치 교수는 “해녀들은 일제 강점기 제주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되는 가장 초기 과정의 임금노동자이면서 이주노동자”라며 “전시체제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지만 다양한 문화체험을 한 선구자들이었으며, 봉제공장 등에서도 일하며 수입원을 찾았던 개척자들”이라고 평가했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 [사설] 노동자 안전 뒷전 중대재해법 후퇴가 민생 대책인가](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300/180/imgdb/child/2024/0116/53_17053980971276_2024011650343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①국내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32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768.jpg)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 [올해의 책]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 다시 책으로 ②번역서](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3/1228/2023122850380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