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과 오동동은 1980년대까지 경남 최대 상권을 자랑했다가 90년대 들어 급격히 몰락했다. 그런데 최근 도시재생으로 활기가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과연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통술골목의 ‘오동동 소리길’에 들어서면 ‘오동동타령’ 등 마산을 소재로 하는 노래 5곡이 흘러나온다. 지난달 19일 통술집들이 모인 통술골목의 140m 구간이 오동동 소리길로 꾸며졌다.
한때 ‘경남의 심장’이라고까지 불렸으나 1990년대 들어 급격히 몰락한 마산 창동·오동동이 최근 되살아나고 있다. 거리는 젊은이들로 다시 북적이고, 문을 닫았던 가게들도 하나둘 영업을 재개하고 있다. 이승일 오동동상인연합회 사무처장은 “창동·오동동의 분위기가 한창 호황을 누리던 80년대의 70% 정도 수준으로 올라간 것 같다. 이제는 빈 점포가 거의 없고, 매출도 30%쯤 올라갔다. 최근에는 주인이 바뀔 때 권리금을 주고받는 점포도 다시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15일 창원시 조사 결과를 보면, 창동·오동동 일대 주요 지점 7곳의 시간당 평균 행인 수는 2011년 12월 1603명에서 2012년 12월 2749명으로 1년 새 70% 이상 늘었다. 반면 이 일대 빈 점포는 2012년 1월 187곳, 2012년 12월 106곳, 2013년 7월 68곳 등 빠르게 줄고 있다.
창동예술촌이 조성되기 전 창동 골목은 1980년대 이후 가게들이 문을 닫아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창원시 제공
창동과 오동동은 80년대까지 그 자체로 마산의 상징이자 자랑이었다. 창동은 1760년 조선 영조 36년 조공미를 저장하는 조창이 설치되면서 조성된 250여년 역사를 가진 곳이다. 창동과 맞붙어 있는 오동동은 1914년 오산리와 동성동이 합쳐지면서 생긴 동네다. 일제 강점기 창동과 오동동은 한국인 거주지였던 ‘구마산’의 중심지로서 일본인 거주지였던 ‘신마산’에 맞서 한국인들에게 자존심의 보루였다. 해방 이후에도 마산의 중심지였고, 80년대 마산이 전국 7대 도시로서 최전성기를 누릴 땐 함께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마산의 현대사는 창동과 오동동을 빼면 설명하기 어렵다. 1960년 3월15일 아침 9시께부터 성난 시민들이 오동동 165번지 당시 야당인 민주당 마산시당으로 몰려들었다. 선거번호표를 받지 못해 이날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도둑맞은 내 표를 찾아달라”고 민주당에 호소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 운동인 ‘3·15 의거’는 이렇게 시작됐다.
4월11일 오전 11시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진 김주열(당시 17살)군의 주검이 떠올랐다. 마산 시민들은 들고일어났고 시위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3·15 의거 당시 마산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12명에 이르렀다. 옛 민주당 마산시당 건물 벽면에는 이들 12명의 사진 등을 붙여 이곳이 ‘3·15 의거 발원지’임을 알려주는 조형물이 조성됐다.
마산 시민들의 의로운 기상은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부산과 마산 일대 민주화 시위인 ‘부마항쟁’의 밑거름이 됐다. 이런 이유로 마산은 야당 도시라는 뜻의 ‘야도’로, 창동과 오동동은 ‘경남의 심장’으로 불리게 됐다.
그런데 창동·오동동이 뜨거운 심장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동동은 요정과 바의 동네라고 할 만큼 낭만과 유흥이 넘치는 곳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50년대 중반부터 청수원, 춘추원, 마산별관, 송원 등 고급 요정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오동동바, 아리랑바, 은좌바, 라스베가스바, 신세기바, 백만불바 등 밴드가 있는 맥주홀인 바도 생겼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로 시작되는 야인초 작사, 한복남 작곡의 ‘오동동타령’이 발표된 때가 바로 요정과 바가 전성기를 누리던 57년이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에게 요정과 바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위해 등장한 것이 ‘통술집’이다. 요정 음식 못지않은 맛있는 음식을 싼값에 한 상 통째로 차려준다는 뜻으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요정에서 일하다 독립한 이들이 주로 통술집을 열었다. 80년대 중반까지는 술값을 빼고 1만원이면 4명이 푸짐한 한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오동동에 요정과 바는 자취를 감췄으나, 통술집은 여전히 30여곳이 통술골목에 모여 성업중이다.
통술골목 인근에는 6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아구찜골목’도 있다. 이곳의 아귀찜 식당 30여곳은 생아귀로 요리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겨우내 찬 바람에 피들피들 말린 아귀를 쓴다. 술꾼들의 술안주로 아귀찜을 팔고, 다음날 아침엔 그 술꾼들의 속풀이 해장국으로 아귀탕을 팔았다. 이들은 5월9일을 ‘아구데이’로 정해 해마다 이날 축제를 연다.
그러나 83년 경남도청이 부산에서 창원으로 옮기는 등 인근 창원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반대로 마산은 빠르게 쇠락했고, 창동과 오동동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거리는 텅 비고, 가게는 문을 닫고, 해만 지면 캄캄해졌다. 극장 5곳은 모두 문을 닫았고, 마산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부림시장에서도 대부분 상인들이 떠났다.
창동과 오동동을 되살리자는 운동은 2007년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상인들로부터 시작됐다. 이듬해엔 도시재생 민관협의체도 꾸려졌다. 이 운동은 마산·창원·진해 등 3개 시를 합한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본격화됐다.
창원시는 지난해 2월 마산 원도심 재생 기본계획을 세웠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도시, 역사성이 뚜렷한 문화예술도시, 공원·광장·녹색교통이 함께하는 건강한 도시, 모두가 교류하는 주거소통도시를 2020년까지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지난해 7월 도시재생과를 만들어 전담시켰다. 내년 말에는 지하주차장, 문화시설 등을 갖춘 5000㎡ 규모의 ‘오동동 문화광장’도 완공된다.
지난해 5월25일 ‘창동예술촌’이 문을 열었다. 창원시는 창동거리 주변 빈 가게 70곳을 임대감정평가액의 60%로 2년간 임대했다. 나머지 40%는 건물주가 기부하도록 했다. 어차피 몇 년째 비워둔 점포였기에 건물주들도 이득이었다. 이곳에 예술가 59명이 입주했다. 인테리어 비용은 개인 작업실을 거저 갖게 된 예술가들이 냈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즐거운 창동이라는 뜻의 마을기업 ‘창동라온빛’도 차렸다. 창원시는 최근 70곳 건물주들과 일괄적으로 임대 기간을 2년 연장하는 계약을 했다.
이달 말에는 부림시장이 ‘창작예술촌’으로 변신한다. 창원시는 가게 88곳이 들어선 부림시장 건물을 몽땅 10년간 임대하고, 첫 2년간은 무상 임대하기로 가게 주인들과 계약했다. 공사가 완료되면 공예작가 26명이 입주할 예정이다.
오동동상인연합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 창동거리에서 벼룩시장을 연다. 내년엔 거리에 조형물과 벽화를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 자동차 통행이 금지된 ‘문화의 길’에 인공 실개천을 만드는 것도 논의중이다. 창동·오동동 일대 6개 시장의 상권 회복을 위해 만들어진 오동동·창동·어시장 상권활성화재단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창동·오동동 골목여행을 펼치고 있다.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김경년(49) 골목해설사는 “낡은 옛 도심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어려웠는데, 공영주차장을 지어 고질적인 주차 문제를 해결하자 상인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골목 구석구석 버려진 쓰레기도, 그곳에 예술작품을 배치하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말했다.
마산 원도심 재생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새로운 고민거리도 생겨나고 있다. 창동예술촌이 창동·오동동 부흥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상권이 되살아나면 건물주들이 예술가들을 내보내고 가게를 운영하거나 비싼 값에 빌려주려 할 것이라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창원시의 예산 지원도 장기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배선일 창원시 도시재생과 과장은 “마중물 수준의 사업을 추진했는데 시 예산만 50억원 넘게 들었다. 인구 110만명의 우리나라 최대 기초자치단체인 창원시로서도 예산 투입을 장기화하기는 부담스럽다. 시비 부담을 줄이면서 사업을 지속할 방안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창원/최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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