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4가 지하상가에 최근 가게를 마련한 창업 청년들이 3일 지하상가 어귀에서 저마다 이야기와 멋을 담아 만들거나 다듬은 가방, 공예품, 시계, 로봇 조명 등 다양한 상품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혼수품 메카’ 종로4가 지하상가
시설 낡고 유동인구 줄며 침체
109개 가게 중 17개는 빈 가게
시설 낡고 유동인구 줄며 침체
109개 가게 중 17개는 빈 가게
“돈 벌고 싶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일하는데 왜 나만, 왜 나만 항상 배가 고파야 할까. 으~음~ /…/ 돈 벌고 싶다, 희망을 쓰는/ 돈 벌고 싶다, 모두 잘 사는/ 돈 벌고 싶다, 남이 잘 되게/ 돈 벌고 싶다, 같이 살게. 으~음~.”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4가 지하상가의 통로 중앙에서 열린 작은 공연에서 노래가 흘렀다. ‘청년과 종로, 지하상가’의 만남을 축하하는 자리로, 이곳에 입주한 영스공방의 주인 김영백(39)씨가 곡을 쓰고 가사를 붙인 노래다. 이날 공연에선 청년들과 기존 상인들의 합주도 이어졌다. 기타와 아코디언으로 ‘동백아가씨’가 연주될 때에는 주변 상인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종로4가 지하상가, 한때 혼수품과 맞춤양복으로 이름이 높아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로 붐볐던 곳이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에 더해 불황의 직격탄을 맞아 이제는 오가는 사람조차 드물다. 하루 유동인구가 250명 안팎이라는 얘기도 있다. 지하철역과 떨어져 있는데다 2011년 만들어진 지상 횡단보도가 지하상가엔 ‘악재’가 됐다. 시설은 낡고, 상인들도 나이가 들어 위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빈 점포가 늘어갔다. 이렇게 기름 떨어진 호롱불처럼 사그라지고 말 것인가?
지하상가를 관리해온 서울시 산하 서울시설공단은 지난해 고심 끝에 서울시 청년일자리허브(청년허브)와 머리를 맞댔다. 청년허브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간이 필요한 처지였다. 양쪽은 지난해 7월 종로4가 지하상가의 빈 공간을 청년들의 활동 공간으로 제공해 낙후된 상권을 활성화하고 청년실업의 출구를 찾아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서울시설공단은 공간이라는 자원을 내놓고, 청년허브 쪽은 상권 활성의 동력이 될 청년들을 보낸 셈이다.
입주 업체 선정부터 신중을 기했다. 이른바 스펙이나 학벌 대신 ‘공감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수익 모델을 갖췄는지에 주목했다. 어느 대학 출신인지는 묻지도 않았다. 청년들의 자발성과 창조성으로 공간을 재미있으면서 독특하게 바꾸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발길을 모아 상가를 활성화한다는 얼개를 짰다. 이렇게 전체 109개 점포 가운데 비어 있던 17곳이 청년 창업가들로 채워졌다. 경쟁을 뚫고 선정된 14개팀 청년 25명이 입주했다.
오성규 서울시설공단 이사장은 “그동안 지하상가는 공공자산임에도 수익성 위주로 운영되면서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못했다. 청년 상가는 실업문제 해법이면서도 공유경제를 향한 실험이다. 청년들이 앞으로 1년 동안 자립할 체력을 키우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선택한 업종은 가죽공방, 잡화점, 생활한복, 양말인형, 뜨개질, 빈티지시계, 집빵, 수공예, 로봇교구, 패브릭 디자인 등 다양했다. 사회적기업 ㈜쌈지농부도 참여했다. 분야는 달랐지만 ‘무언가를 만들고, 이야기를 담고, 물건의 가치를 전하겠다’는 지향점은 비슷하다.
신학대를 졸업한 김영백(39)씨는 가죽공예를 들고 둥지를 틀었다. 목회활동을 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기초단위인 손의 가치’에 고민하다 가죽공예를 배웠다고 했다. “작업 공간이 생긴 것도 좋지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청년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그는 시계엔 시곗줄, 한복엔 가죽 소품 등으로 협업할 길을 찾고 있다.
㈜쌈지농부는 다 쓰고 버리는 소방호스나 쌀포대, 현수막 등으로 가방·신발을 만든다. 천재용(37) 대표는 “이곳만큼 접근성이 좋은 곳도 없다. 콘텐츠만 좋아지면 가능성이 있다. 유통을 해온 경험을 살려 함께 들어온 친구들이 만든 제품을 홍대 매장 등에도 팔 계획”이라고 말했다. 천 대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두레 홍보와 청년들의 반상회도 열 생각이다.
대학원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한 이민경(27)씨는 대안미디어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이야기가 있는 물건을 팔려고 ‘우주의 포크송’을 열었다. “여기선 파이프로 만든 로봇 조명을 전시하고 있어요. 나중엔 종로4가 주변 광장시장이나 예지동 시장 등에서 일하는 장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신문도 만들고 싶어요.”
문예창작과를 마치고 고시 공부를 하던 남승민(37)씨는 ‘삶의 무게’를 줄이고 싶어 평소 좋아하는 시계 수집에 나섰다. 시계를 수집하면서 알게 된 장인들과 함께 중고시계를 수리해 외국 온라인 쇼핑몰 등에 판다. 남씨는 “과거의 사물은 무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만든 이곳이 창조의 산실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의상학과를 나와 한복집에서 6년간 일한 최선희(30)씨는 ‘세탁기로 돌릴 수 있는 전통 한복’을 만들어볼 참이다. 최씨는 “아직 버는 것은 적지만 행복지수는 어마어마하다. 한복 재료로 액세서리를 만드는 워크숍도 열었다”고 했다.
포부는 이처럼 원대하지만 아직은 시작 단계다. 입점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지금은 블로그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한 주문,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찾아오는 고객이 대부분이다. 올해엔 공동브랜드도 만들어 한땀한땀 손으로 만든 물건의 가치를 알려나갈 참이다. 서울시설공단 쪽도 다른 시설을 활용해 ‘종로4가 청년들’이 생산한 제품을 팔 방법을 찾고 있다. 공단은 종로4가에 이어 서울 강북지역 다른 상가에도 청년 입점을 늘릴 계획이다.
무엇보다 종로4가 지하상가 기존 상인들의 눈길이 달라졌다. 처음엔 거부감도 비쳤지만, 청년들이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니 말길이 트였다. 40년 동안 맞춤양복을 만들어온 송광용(56)씨는 “상가가 죽어가는데 빈 점포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은 좋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팔겠다는 품목이 과연 상품화될 수 있을까 싶다. 돈을 벌어야 버틸 수 있다”며 “성공하려면 항상 가게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애정어린 충고를 했다. 상인 김낙훈(66)씨는 “아직은 조금 서먹서먹하다. 그래도 상인들과 청년들은 아버지뻘, 아들뻘 아닌가. 서로 상부상조하다 보면 찾아오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전명훈(56) 종로4가 지하상가 상인회 회장은 “정체된 상가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니 활기가 돈다”고 말했다.
취업하려 아우성치는 시대에 자신의 길을 택한 청년들이 종로4가 지하상가에 뿌리내리기까진 넘어야 할 고비가 적지 않아 보이지만, 이들의 도전은 당차 보였다.
사회적기업 ‘이음’의 김병수 대표는 ‘물건만 갖다 팔지 말고 아이디어와 기술을 접목해 공연, 파티, 청년 워크숍과 아카데미 운영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할 것’을 조언했다. 그는 전북 전주시 대표적 재래시장인 남부시장에 ‘청년몰’이란 이름으로 청년가게 24곳이 뿌리내리도록 도운 바 있다. 김 대표는 “창업에선 서로 아이디어를 내고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장사도 문화다. 열심히 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적 트렌드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람들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전효관 서울시 청년일자리허브 센터장은 “청년들의 창업 도전은 서울의 과거 속에서 서울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의미가 있다. 지하상가와 주변의 장인들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청년들의 감각으로 끌어내어 상생하는 구조를 만드는 게 성공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정태우 기자 windage3@hani.co.kr
서울 종로4가 지하상가에 창업 둥지를 튼 청년사업가들이 지난달 21일 지하상가 통로에서 '청년과 종로, 지하상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기존의 상가 상인들과 함께 개업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서울 종로4가 지하상가에 창업 둥지를 튼 청년사업가들이 지난달 21일 지하상가 통로에서 '청년과 종로, 지하상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기존의 상가 상인들과 함께 개업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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