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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마을발전기금, 주민들 분란의 씨앗

등록 2015-03-08 20:18수정 2015-03-09 11:45

4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마을 앞에서 한 주민이 화원~진도 송전선로 공사로 들어선 쌍둥이 송전탑 앞에서 월동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해남/안관옥 기자
4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마을 앞에서 한 주민이 화원~진도 송전선로 공사로 들어선 쌍둥이 송전탑 앞에서 월동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해남/안관옥 기자
탈 많은 마을발전기금
지난 4일 오전 11시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앞. 주민 5명이 송전탑에서 30m 떨어진 밭에서 월동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송전탑에는 ‘감전사고 위험이 있으니 5m 이상 안전거리를 유지하라’는 경고 문구가 나부꼈다. 지난해 11월 기존 선로에 하나를 추가하면서 마을 입구에 있는 이 송전탑은 쌍둥이가 됐다. 배추밭에선 이 쌍둥이 철탑을 비롯해 모두 16개의 송전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산등성이에 가려 윗부분만 보이는 것들까지 포함하면 25개를 웃돌았다. 이 마을 주민들은 지난해 3월 한국전력으로부터 “해남 9개 마을 중 학동리만 남았다”는 압박을 받은 끝에 마을발전기금 1억3000만원을 받고 송전탑 반대 뜻을 접었다.

이날 오후 4시 같은 송전선로가 지나는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마을회관에선 주민 5명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날 타결된 한전과의 협상 과정이 화제로 떠올랐다.

주민들은 마을발전기금 3억8000만원을 받고 2년 동안의 협상을 매듭지었다. 협상이 길어지면서 기금이 다소 많아졌지만, 이들은 “앞으로가 걱정”이라며 말을 아꼈다. 진도 15개 마을 중 5개 마을이 단합해 지원을 더 받기는 했어도 애초 뜻을 이루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여태껏 마을에서 200m 떨어진 선로를 지하로 묻거나 노선을 바꾸라고 요구해온 터였다.

이 마을들은 한전이 시행 중인 154㎸ 화원~진도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이다. 이 사업은 1990년대 중반에 설치된 해남 문내면~진도 군내면 14.5㎞ 구간의 2회선을 4회선으로 늘리는 공사다. 지역에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제주도행 해저선로의 우회망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오는 10월까지 24개 마을에 송전탑 37기를 세우고, 송전선로를 설치할 예정이다. 이 공사에는 관련 법률에 따라 선로 공사비 160억원과 토지보상비 9억원이 들어간다. 이 법정 비용 말고 민원을 해소하기 위한 특수보상비(마을발전기금)가 따로 책정됐다.

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한전이 이 공사를 위해 24개 마을에 전달한 마을발전기금은 줄잡아 30여억원에 이른다. 공식적인 토지보상비 9억원보다 ‘뒷돈’으로 건네는 특수보상비가 3배가 넘게 들어간 셈이다. 마을발전기금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가 뚜렷했다. 해남 9개 마을은 마을당 5000만~1억3000만원에 도장을 찍었다. 한전은 마을발전기금이 적다며 불평하는 한 마을에는 청년회·노인회 관광비로 2000만원, 경로당 전자제품 구입비로 1500만원 등 3500만원을 더 얹어주기도 했다. 올해 설을 앞두고는 60㎏(100근)짜리 돼지 한 마리씩을 해남 쪽 마을들에 돌리며 선심을 썼다.

협상이 더디게 진행됐던 진도 15개 마을은 5000만~3억8000만원을 받았다. 이 가운데 선로에서 가까운 4개 마을은 해남 쪽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2억5000만원 이상에 합의를 했다. 한 마을은 3억원대 중반을 두고 아직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진도 쪽은 준공 7개월 전인데도 첫삽조차 뜨지 못했다.

해남 학동리 정무웅(63)씨는 “2억5000만원 이상 받은 진도 마을과 우리 마을 중 어디가 선로에 가까운지 거리를 재보자는 말도 나왔다. 서운해도 70·80대 노인들뿐인데 어쩌겠나”라며 한숨을 지었다. 진도 덕병리 이장 정대성(57)씨는 “반대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협상에 들어가면서 돈을 주는 한전은 ‘갑’, 더 받으려는 우리는 ‘을’이 됐다. 자금과 정보, 인맥을 틀어쥔 한전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밀양사태 때 마을발전기금 위력
공사반대 무마 위해 노골적 활용
해남 문내면~진도 군내면 14.5㎞ 확장
24개 마을에 30억…토지보상비 3배
지역따라 반발 큰 마을엔 더 얹어줘
한전-주민 갈등, 마을·주민간 마찰로
‘갑질’ 수단 악용우려 법제화 목소리

새만금 송전선로(345㎸) 건설 사업이 진행중인 전북 군산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송전선로와 가까운 군산 미성동 주민 박영칠(77)씨는 “보름 전에 한전 직원이 인근 마을에 찾아와 발전기금을 얘기하고 다니길래 다툰 적이 있다. 한전의 주민 유인책과 관련해 확인되지 않은 여러 소리가 들려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은 “한전에서 ‘지금 찬성하면 발전기금을 더 많이 받고 나중에 찬성하면 발전기금을 덜 받는다’고 하며 돈으로 공사 반대 주민들을 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산 옥구읍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장형찬(68) 위원장은 “철탑에 가까운 마을은 전자파 때문에 사람이 살 수가 없게 된다.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데 발전기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옥구읍에서 생산한 쌀은 서울 등에 급식용으로 나가고 수출도 한다. 송전선로를 논밭 대신 새만금 쪽으로 우회하면 되는데 왜 이런 옥토를 없애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전은 이렇게 공사 반대를 무마하기 위한 무기로 마을발전기금을 활용하고 있다. 이는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경남 밀양에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마을에 뿌려진 발전기금은 한전 대 주민의 갈등을 마을과 마을, 주민과 주민의 마찰로 바꾸는 마술을 부리기 일쑤였다.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이계삼 사무국장은 “발전기금은 사실상 반대하는 주민을 매수하는 것이다. 발전기금을 주면 마을은 순식간에 받느냐 마느냐, 어떻게 나누느냐 등을 두고 분열하고 만다. 밀양에서도 역기능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더욱이 한전의 마을발전기금은 원전이나 쓰레기매립장·하수처리장 등 환경기초시설 주변 지역에 주는 지원금과는 달리 법률적인 근거가 없어 사업자인 한전이 자의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한전은 93년부터 내규인 ‘송변전설비 건설 주변 지역의 특별지원에 관한 규정’에 따라 특수보상비를 써왔다. 한전은 시장형 공기업으로서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별도의 법령 근거 없이도 집행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한전이 지원하는 특수보상비는 보통 한 해에 100억원대였지만, 밀양 사태의 영향으로 주민의 경각심이 커지면서 2013년 232억원, 2014년 236억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를 현장에서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운영하면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반발이 거세면 더 주고, 없으면 뭉개는 등 주먹구구로 대응하기 때문에 765㎸ 노선보다 전압이 낮은 154㎸ 노선 지역이 더 받거나, 이격거리나 철탑 개수 등 객관적 조건이 나쁜데도 덜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한전은 액수가 정해지면 “추가로 민원을 내지 않고, 공사를 일절 방해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요구한다. 농로 파손, 소음·분진 유발, 전자파 발생 등 송전선로 건설에 따른 피해를 주민에게 당연히 보상해야 하는데도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항복문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에도 산업통상자원부는 특수보상비에 대해선 손을 놓고 있다. 산업부 전력산업과 쪽은 “마을발전기금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는 있지만 불법은 아니고, 사업자의 영역이라고 본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부의 수수방관 속에 전남 여수, 울산 울주, 경북 청도, 충남 당진, 제주 조천 등 전국 10여곳에선 여전히 송전선로를 둘러싼 한전과 주민의 갈등이 진행 중이다. 곳곳에서 마을발전기금이 ‘갑질’의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큰 만큼 법제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제남 정의당 의원은 “한전의 자의적인 지원은 마을 간 형평성 시비와 마을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법적 근거와 피해범위 조사, 주민 간 합의를 통해 마을발전기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 쪽은 “통상 건설비의 0.15%를 현장에서 민원대책비로 쓰지만, 주변 마을에 지원하는 특수보상비는 별도로 집행한다. 밀양 이후 주민의 권리의식이 높아져 건설공사가 어려워지고 지원 액수도 늘어난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해남 진도 군산/안관옥 박임근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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