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담담
전남대 철학과 강사 17,8세기 유럽 철학자들은 인식을 재현이라고 보았다. 참된 인식, 나아가 참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물이 불러일으킨 나의 심적 상태를 재현할 명확한 기호를 선택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나의 감각에 부합하는 기호는 좋은 기호지만, 그렇지 못한 기호는 나쁜 기호이기에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기호는 재현의 임무를 띠었고, 지식은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갖는 기호들의 축적으로 이해되었다. 대의제는 철학적 영역에서 재현의 인식론을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 적용한 것이다. 참된 앎을 보증하는 인식의 기호들이 정치적 영역에서는 민의를 재현하는 민중의 대표들이다. 동일한 재현의 임무를 부여받긴 했지만, 정치적 재현 기호가 인식의 재현 기호와 사정이 같은 것은 아니다. 지식에 복무하지 못하는 기호들이야 정합적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내다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민중의 뜻을 대리해야 할 정치적 대표들은 우리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호들이라 다루기가 수월치 않다. 공익을 빙자하여 사익을 추구하기도 하고, 교활한 정치 담합으로 민중을 배반하기도 한다. 때론 민의를 거스르면서 민의에 맞서는 ‘불량 기호들’이 대량 속출하는 불운한 사태가 도래하기도 한다. 대의제의 이런 결함을 잘 알고 있었던 존 로크는 국민의 직접 행동, 즉 혁명으로 대의제의 폐해에 맞서라고 권한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질 나쁜 기호들은 과감하게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중을 농락한 ‘불량한 재현 기호’다.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그의 거짓담화가 세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진정성도 없고, 뉘우침도 없었다. 모든 범죄 혐의를 모르면서 행한 것이라 강변했고, 사익에 복무했던 모든 사이비 정책들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을 밥 먹듯이 배반하고, 정치적 궁지에서 빠져나갈 시나리오를 짜는 데만 열과 성을 다했다. 광장은 박근혜와 그 수족들의 심판을 외쳤다. 탄핵안 가결이 초읽기에 들어가기까지 매주 수백만의 시민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밝혔다. ‘바람 불면 촛불은 꺼지기 마련’이라는 반민중적 발언에 맞서 횃불로 탄핵의 바람을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촛불은 ‘한 사람에 반하는 모두의 권력’이 되어, ‘모두에 반하는 한 사람의 권력’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이만하면 우리, 이제 승리의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해도 되지 않을까. 촛불을 끄고 광장을 떠날 준비를 해도 좋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다. 탄핵안이 가결되면 촛불은 어디로 향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6차에 걸친 촛불집회 과정에서 어떤 사회적 상상의 연대가 이뤄졌음은 분명하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광장의 시민들은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를 원한다고 외쳤다. 어떤 정치를 밝힐 것인가? 우리는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의 정치를 위해 촛불을 밝혔다. 탄핵안 가결은 우리가 광장에서 그려낸 사회적 상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첫 걸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탄핵 가결 이후 소소한 차이가 가시화되면 누군가는 귀가를 서두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여전히 촛불을 밝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묶여서 풀기가 만만치 않은 매듭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박정희가 남긴 유신의 매듭, 정경유착의 매듭, 노동착취의 매듭, 빈부격차의 매듭, 수없이 많은 부정부패의 매듭들이 한 데 얽힌 채 탄핵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박근혜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한 장면, 한 삽화, 한 매듭에 불과할 뿐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단칼에 내리쳐야 한다.’ 복잡하게 꼬인 매듭을 풀려면, 매듭을 지탱하는 못을 뽑아버리거나 매듭을 베어 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아직 매듭을 쳐 낼 칼자루를 온전히 손에 쥐지 못했다. 하여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촛불을 밝히며, 광장의 동력을 이어가야 한다.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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