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17일 밤 광주 금남로 촛불집회 연단에서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히고 있다.김향득 사진가 제공
“사람은 좋은 것 같은디, 어찌 좀 맥아리가 없게 보여.”
17일 저녁 7시께 광주시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정아무개(53)씨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연설 ‘관전평’을 이렇게 집약했다. 힘과 기운을 뜻하는 속어인 ‘맥아리’라는 말은 ‘정치적 카리스마’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박 시장은 이날 더불어 민주당 연사 자격으로 금남로 촛불집회 연단에 서서 “지난 5월 제가 광주에서 여러분과 약속했듯이 저는 역사 뒤에 숨지 않겠다고 약속드렸다”며 “다시 광주에서 그 약속을 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대권도전” 의사를 밝힌 셈이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무대에 선 박 시장에게 ‘따뜻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앞서 박 시장은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 민주묘지 들머리에서 방명록에 ‘광주정신 이어받아 정권교체의 길에 앞장서겠다’고 적었다. 박 시장은 답보상태인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날 1박2일 일정으로 ‘야권심장부’인 광주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시장은 이날 금남로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전 전국에서 모인 지지자들과 함께 광주의 어머니 산인 무등산에 올라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앞서 박 시장은 이날 오전 옛 망월동 5·18묘지에서 고 백남기 농민의 넋을 추모한 뒤, “저도 광주항쟁에 빚진 자로서, 늘 (광주를) 생각해 왔고, 실제로 인권운동, 시민운동을 하면서 항상 5·18민주항쟁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활동을 해왔다”며 ‘광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17일 낮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쓴 방명록.정대하 기자
하지만 박 시장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호남 찬사를 밝히고 있지만, 호남 지지율은 답보 상태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아래 각 여론조사의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 공정심의위원회 누리집에서 확인)에서 호남지역 지지율 변화 추이를 보면, 박 시장은 ‘탄핵국면’에서 ‘대량 실점’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월 24일 리얼미터가 전국 19살 이상 성인 15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 시장은 여야 차기 대선 주자 지지도에서 14.6%로 3위였다. 호남지역에서 안철수(25.4%)-문재인(20.4%)과 3강구도였던 셈이다. ‘촛불집회’가 시작되기 직전인 10월 25~26일 <한겨레>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박 시장은 호남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에서 10.6%로 문재인(17.3%)-안철수(13.5%)에 이어 3위를 차지했고, 이재명 성남시장이 7.7%로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호남에서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이 요동쳤다. <국민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3~15일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호남에서 정당 지지도는 민주당(40%)이 국민의당(12%)을 앞질렀다. 그리고 호남지역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는 문재인(26.3%)이 1위였고, 이재명 성남시장이 13.8%로 2위를 차지했다. 박 시장은 반기문(9.4%)-안철수(8.9%)-안희정(6.7%)에 이어 6위로 뚝 떨어졌다. 물론 차기 대권주자를 정하지 못했다는 답변이 27.3%로 부동층이 높은 상태이지만, 지금까지 박 시장은 ‘촛불혁명’의 와중에 큰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질 못했다. 두 자녀와 함께 촛불집회장에 나온 이난영(37·광산구 우산동)씨는 “박 시장이 서민들과 약자들을 위한다는 점에서 호감은 있지만, 너무 정치적 발언에 대해 신중하고 소극적인 것 같다. 지금은 난 문재인 전 대표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3~15일 조사한 차기 대선 후보 지지도 여론조사 결과.중앙선거관리위원회여론조사 결과 캡처.
박 시장이 호남에서 지지율이 뜨지 않고 점차 추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당수의 시민들은 “대중과의 소통능력이 한 박자씩 늦다”고 지적한다. 이날 옛 망월동 5·18묘지에서 만난 최강은(54)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장은 “박 시장은 기가 막힌 상품이지요. 좋지요. 시대정신과 행정경험도 있잖아요. 그런데 아직은 자기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요. 전라도 말로 너무 점잖아요. 이재명 시장처럼 임팩트 있게 치고 나가야 하는데…박 시장도 정치인으로선 진실한 임팩트를 보여야겠지요”라고 말했다.
고 나병식 선생 3주기 추모식장에서 만난 박아무개(66)씨도 “박 시장이 시대에 맞는 판단을 너무 유보하신 것 같다. 본래 정치라는 게 좀 그래도 기본적으로 철학과 내공이 필요한 것인데, 다 갖추고 있으면서, 그것을 너무 자로 재시는 것 같다”며 “난세나 혼돈의 시기엔 어쨌든 간에 대중만 보고 국민만 보고 나가야 해. 머뭇머뭇하면 결국 여기서 (지지율이) 지체되고 말제”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박 시장에게 ‘트럼프 같은 샌더스의 면모’를 원하고 있는 듯 했다. 미국 민주당 경선 후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진보적 정책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와 같은 ‘거침없는 대소통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범도(61)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는 “박 시장은 너무 샌더스 같다. 솔직히 정치에선 긍정적 의미의 ‘포퓰리즘’(대중주의)도 필요한 것 아니냐? 이재명 성남시장은 대중들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다”고 했다. 전용호(60) 메이엔터테인먼트 대표도 “시정을 개혁적이고 개방적이고 혁신적으로 잘 하시더라. 근데 인기가 잘 안오르는 것은 아마 국면마다 시원시원한 발언을 좀 못하시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7일 밤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있다.김향득 사진가 제공
그러나 앞으로 호남에서 야권 주자의 지지도가 출렁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윤영덕(50) ‘광주로’ 지역공공정책연구소장은 “박 시장은 오랜 시민사회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런데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메시지가 난해하다. 앞으로 ‘탄핵정국’이 차츰 경과하면 ‘새로운 대한민국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박 시장은 그 때가 되면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한 자기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오아무개(49)씨도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인지 논의가 시작되면 박 시장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 지지율도 변화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박 시장은 이날 밤 광주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솔직히 제가 정치적으로는 허약하다”고 ‘약점’을 시인했다. “여의도 정치를 해본 적도 없고, 정치적 수사에 능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박 시장은 하지만 “감히 서울시장 재임 5년을 통해 역사적인 고비고비마다 비전과 경험, 협치와 혁신이라는 화두를 갖고 정치적 성취를 이뤄왔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간의 정책적 성취를 ‘디테일’하게 설명하며 “준비된 후보”, “일 해본 후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7일 오전 광주 망월동 옛 5·18묘지를 찾아 고 백남기 농민의 넋을 기리고 있다. 정대하 기자
민주당 주류에 대한 ‘견제구’도 날렸다. 박 시장은 “경선의 과정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지, 정말, 그 과정이 흥미진진한 살아있고, 누가 될 수 있을 지 아슬아슬한 경선이 되지 않고, 이른바 ‘대세론’이 그대로 작동된다면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후보의 확장력이 심각한 위기를맞을 것이다. 그리고 여당이나 다른 당에서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면 민주당이 승리한다는 보장 못한다”고 강조했다.
‘고구마’(문재인)-‘사이다’(이재명) 논란과 관련한 의견도 에둘러 밝혔다. 최근 박 시장은 “발효될수록 맛있는 묵은지”라고 비유했고, “사이다와 고구마, 김치는 서로 돕는 한상(차림)”이라고 이야기했다. 박 시장은 “우리 사회가 국가 운명을 좌우할 리더에 대해 조금은 이성적이고, 깊이 있는 분과 그 사람의 삶에 대해 고뇌하지 않으면 안된다. (야권 주자) 과거 삶의 궤적과 성취, 한계를 잘 분석하면 서로 얼마나 다른 지 잘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시장은 또 “호남 민심은 통합을 이룰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호남 민심은)지금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탐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날 동행한 박 시장 쪽의 한 인사는 “문재인 대표에겐 확장성으로, 이재명 시장에겐 안정성과 경륜으로 더 우위에 있다”고 덧붙였다.
박 시장은 이른바 정치권의 ‘3지대론’에는 분명하게 반대했지만, ‘촛불 시민혁명’ 이후의 역풍을 경계하며 ‘야권통합’을 거듭 강조했다. “(대선이) 만만한 선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촛불시위 뒤 새로운 보수가 등장할 거예요. 정말 경각심을 갖고 우리 자신부터, 당부터 개혁해야 정권교체가 가능하지요. 정권교체를 넘어서서 국민들이 요구하는 시대의 과제들을 ‘스마트’하고 완벽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정권 교체 3년 후 백만 촛불에 직면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광주/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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