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담담
복지공동체 여민동락 대표 살림꾼 전국 주민센터 ‘주민모임’에 종종 특강을 나간다. 뒤끝 씁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입구엔 참석자 방명록이 있고, 공무원 몇 분이 줄줄이 서서 참석확인 서명을 받는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구청장은 오질 않는다. 사회자인 공무원은 “죄송합니다. 청장님께서 거의 다 도착하셨답니다. 10분 정도 지연되는 점 양해 바랍니다”라며 안내방송을 한다. 구청장의 등장과 함께 개회하고, 익숙한 국민의례가 이어진다. 내빈 소개가 지루할 만큼 길어지고 그때마다 주민들은 건조하게 박수를 보낸다. 구청장 인사말은 각종 치적을 홍보하는 데 할애되고, 엄숙한 어조로 마지막 당부도 빼놓지 않는다. “구청과 동사무소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주민들이 노력해야 가능합니다. 전문가를 모셨습니다. 잘 배웠으면 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사회자는 박수를 유도하고, 구청장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이내 강사소개가 이어지고 강의가 시작될 무렵, 구청장과 내빈들이 썰물처럼 빠진다. 강의가 시작되고, 주민들은 저마다 강의시간을 버티려는 듯 갖가지 모습으로 자세를 취한다. 휴대폰만 보고 있는 사람, 처음부터 눈을 감고 있는 사람, 총기 없는 눈빛으로 앞사람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 천태만상이다. 그나마 십수 명 되는 젊은 청년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 신분증을 패용하고 있다. 아뿔싸, 모두 공무원들이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라도 가질 요량이면 그냥 쉬지 말자고 권한다. 중간에 쉬면 주민들이 전부 빠져나가 버린단다. 심지어 강의 끝나고 동장이 귓속말로 한마디 한다. “주민들을 너무 띄우면 주민들이 말을 안 듣습니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주민은 행정집행의 도구가 아니다. 주민이 질서를 정하고 행정은 이에 따르는 게 진정한 자치”라는 내 얘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주민센터마다 이 모든 광경이 익숙하다. 주민모임에 자발적 참여가 없다. 자영업자와 주부들을 빼곤 대낮 주민센터 행사에 누가 참여할 수나 있겠는가. 강사는 판박이 행사의 소품일 뿐이다. 물론 변화는 있다. 혁신적인 주민총회와 공감 토론으로 주민력을 모아내는 저력을 발휘하는 지자체도 눈에 띈다. 그러나 대개 여전히 관치의 망령이 드리워져 있다. 민주주의? 그런 건 없다. 주민은 계몽과 훈육과 동원의 대상일 뿐이다. 민관협력이니 협치니 멋지게 포장은 하고 있지만, 따져보면 허상에 불과하다. 협치의 목표는 ‘자치’다. 공론장을 만들고, 주민 스스로 일상적인 의제를 제시하면서 자치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행정의 역할이다. 마이크를 독점한 소수 엘리트로부터 마이크를 회수해서 마이크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주민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공론장의 힘이다. 행정과 정치는 듣고 따르면 될 일이다. 행정은 공론장의 보조이고 총회의 조연이어야 한다. 공론장을 지원하고 주민의 집단의사를 경청하면서 주민을 주연으로 빛내는 일이 협치의 방향이어야 한다. 주민총회가 주민을 행정집행의 들러리로 대상화하며 ‘공무원들을 도와달라’는 식의 읍소나 ‘주민들이 깨어나야 한다’는 식의 계몽의 장이 되어선 안 된다. 민관협력은 행정의 결핍을 주민이 보충하자는 뜻이 아니다. 행정과 주민 간의 수직적 위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민관협력은 공염불이다. 전국 읍면동에 주민자치위원회가 있고, 지역사회보장협의체도 있다. 민관협력이 필수인 대표적 마을 공론장이다. 자치력을 키우는 마을 민주주의의 풀뿌리 토론마당이다. 마을 의제를 스스로 제기하고 풀어가도록 도우라. 자치는 자치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자치력은 거듭된 체험을 통해서 길러지는 법이다. 시간이 걸린다. 마침내 한국사회를 옭아매고 있는 관치의 독점을 해체해야 가능하다. 협치는 오로지 자치를 향하라. 행정은 보조와 조연이 되어 조용히 경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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