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 소송으로 광주지법 법정에 서는 김재림씨
일제 강제동원돼 나고야항공제작소 근무하고도 임금 한푼 못받아
“왜 아직까지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가 없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제 강제동원돼 나고야항공제작소 근무하고도 임금 한푼 못받아
“왜 아직까지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가 없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김재림 할머니가 지난 2015년 일본 정부로부터 후생연금 탈퇴 수당 199엔을 지급받은 뒤 열린 규탄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광주 한 요양병원에 입원중인 김재림 할머니.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제공
원고 김재림 진술서
(1930. 金在林)
<가족관계>
저는 1930년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370번지에서 1남4녀 중 넷째(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농사라고는 소작 농사가 전부일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언니들은 일찍이 학교를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언니들이 자신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막내 동생마저 학교를 포기하게 할 수 없다며, 부모님 몰래 학교에 다니도록 입학을 시켜줬습니다. 결국 언니들 덕분으로 1944년 3월 화순 능주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됐습니다.
<동원경위>
저는 1944년 3월 화순 능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제 때 광주 시내 부동정(不動町. 현 광주시 동구 불로동)에 친척집이 있었는데, 그 친척집에서 가사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당시 삼촌댁에는 저 이외에 영암군 금정(金井)에서 올라 온 먼 친적 고모님 딸인 언니 이정숙(李貞淑)이 먼저 와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나이는 저보다 서너 살 위였습니다.
그러던 중 같은 나이였지만 생일이 빨라 언니라 불렀던 광주 친척집 언니가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좋은 학교도 보내준다는데 같이 가 보자”고 저한테 권했습니다. 그 언니는 일본 헌병에게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공부시켜준다는 말을 진실로 믿고 있었고, 저도 몇 번 확인해보았는데 일본헌병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몇 번을 생각해 봤지만, 밥 먹고 살기도 힘이 들고 어차피 집안 사정은 중학교에 갈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소학교 때 공부도 어느 정도 하는 형편이어서,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더 해보고 싶은 욕심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공부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에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저는 부모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도망치다시피 기차를 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출발>
1944년 5월 말쯤이었습니다. 드디어 일본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집합 장소는 지금으로 치면 광주시청 격인 광주부(光州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를 인솔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그날 아침 미리 집 앞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따라 집결장소에 갔지만, 모이기로 한 장소에 가면 당연히 있으려니 했던 삼촌 댁 언니 얼굴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모님 딸 이정숙 언니와 저만 광주역에서 기차에 오르게 됐습니다.
기차 탈 때까지도 어떤 상황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주 시내를 다 빠져 나온 후 어느새 다음 역이 고향인 화순 능주역이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늘 보던 고향 역을 지나가려니까 뭔가 잘 못 된 것 같아 뛰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한테 어디 간다는 말 한마디 못 전하고 가게 된 것이 그렇게 죄스러웠습니다. 부모님 얼굴이나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순천을 거쳐 여수까지 가는 동안에 눈이 퉁퉁 붓도록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나와 울었습니다. 가난이 무엇이기에 결국 있는 사람은 뒤로 쏙 빠지고 나처럼 없이 사는 사람만 이렇게 당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수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에서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지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밤배를 타게 됐습니다. 처음으로 그렇게 엄청나게 큰 배를 타 보게 됐는데, 파도에 따라 배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느라 모두 배 멀미를 심하게 했습니다. 차 멀미는 저리가라고 할 만큼 배 멀미는 아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밤새 죽다시피 하다 다음 날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차로 이동해 1944년 6월 1일경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한 기숙사에 도착하게 됐습니다.
<미쓰비시에서의 열악한 생활>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작업복과 세면도구 등 간단한 일상 생활용품 정도를 나눠졌습니다.
미쓰비시에서 일은 하루 종일 비행기 날개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비행기 부속품을 깎는 일, 선반 앞에서 손에 골무를 끼고 뭔가를 꿰매는 일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슨 일이었는지는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이 무척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비행기 동체가 워낙 크기 때문에 페인트칠을 하려고 해도 키가 닿지 않아 여간 애를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서서 팔을 높이 들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깨도 무척 아팠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겨우 14살 정도였는데,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일이었고, 우리 같은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작업을 잘못했다며 현장 감독자들로부터 심하게 꾸지람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 ‘괜히 일하기 싫어 꾀부린다’며 아예 밥까지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서러움에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하루 종일 기계에 매달리다 일 끝나고 저녁때 숙소에 오면 제대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특히 배고픈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한 참 크는 아이들인데다 하루 종일 힘든 일에 지친 몸인데, 먹는 것이라고는 형편없었습니다. 밥도 조금밖에 주지 않았고, 반찬이라고 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처럼 일요일 쉬는 날이 찾아오면 친구들과 함께 몰래 기숙사를 빠져 나와 주변 농사짓는 밭에 들어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배가 고파 친구들과 회사 근처 동네로 나가 고구마 몇 개를 캐서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그때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고야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고향 부모님에게 전해 진 것은 한 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고향 집에 있는 부모님한테 편지를 쓸 수 있었지만, 행여 좋지 않는 내용이 전해질까 봐 편지지 겉봉투는 아예 붙이지 말도록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특별히 할 말도 없고 그저 잘 지내고 있다는 말 밖에 쓸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고향 집에서 딸이 일본에 있다는 편지를 받아보고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자식들만은 귀중하게 키웠는데 이게 뭔 일이냐고 넋을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지진 피해>
1944년 12월 7일, 점심 먹고 얼마 안 지난 시간이었는데, 누군가 뛰어 나가면서 도망가라고 소리치는데 바깥을 보니까 다들 정신없이 뛰어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전혀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그때서야 같이 온 친척 이정숙 언니랑 손을 잡고 도망가는데 공장이 하도 크다 보니 건물을 미처 빠져 나갈 사이도 없이 여기저기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놀라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언니랑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정신을 차려서야 알게 됐지만, 건물더미에 깔려 발만 허우적거리는 사람, 피투성이가 된 사람, 형체는 없이 어디서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소리 등 이런 나리가 따로 없었습니다. 저도 건물더미에 깔려 꼼짝달싹 못한 상태에서 죽을힘을 다해 누구 없느냐며 일본 말로 살려주라고 울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여기 죽지 않고 아직 산 사람이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요행이 발 하나가 바깥으로 나와 있었던지 그걸 본 구조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다시피 해서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무더기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판에 웬만큼 위급한 환자가 아닌 한 특별한 치료라는 것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겨우 빨간 약 아까징끼나 발라주고 페니실린 주사 한번 놔 주는 정도였고,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퇴원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한참 후 정신이 들어 그 언니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옆에 사람들한테 이정숙 언니의 안부를 물었더니 안심 시키려고 그랬던지 ‘저쪽 방에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언니 안부를 들을 수 없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으면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그런다며 몇 번을 부탁하자, 그때서야 언니는 벌써 죽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부모님 두고 머나 먼 타향에 끌려와 있던 처지에 그 언니는 저를 따뜻하게 대해 줘 큰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언니가 죽었다고 하니 완전히 어깨 죽지가 축 늘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정숙 언니의 시신은 화장 된 후, 유해만 쓸쓸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아무튼 지진에 운 좋게 겨우 목숨은 구했지만, 그때 다친 발목과 왼쪽 어깨가 지금도 지장이 있습니다.
<연합군 공습의 공포>
폭격도 정말 무서웠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언제 울릴지 모르는 공습경보 때문에, 하루 일을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왔다고 해서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입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신발도 못 벗고 보조가방까지 메고 자리에 누워야했습니다.
‘웽웽’하고 공습기가 도착하면, 행여나 포탄이 우리한테 떨어질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방공호로 피해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보면 얼마나 약하게 지었던지 그 틈새로 하늘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공습이 멈춰서야 방공호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밤새 잠 한 숨 잘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일은 나가야 했습니다.
<귀국 과정>
지진에 공장 건문 대부분이 무너지고, 폭격마저 심해지면서 1945년 봄 나고야에서 도야마에 있는 미쓰비시 공장으로 이동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힘들게 일했지만 월급이란 건 구경도 못해 봤습니다. 기숙사 사무실에 가서 우표 한 장 가져 오려고 해도 그것마저 월급에서 공제한다고 했는데, 물어보면 통장에 다달이 저축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 후 귀국할 무렵 회사에서는 알아서 짐이며 월급을 챙겨 준다며 걱정하지 말고 아무것도 챙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집에 부쳐 준다는 말에 결국 우리가 소중하게 아끼던 물건이나 간단한 소지품하나 챙기지 못한 채 빈 몸으로 귀국선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가면 부쳐 준다는 것은 다 거짓이 되었습니다.
<결혼·사별 후 지금까지의 생활>
스무 살 때인 1949년 결혼했는데 겨우 1년 6개월 정도 살고 한국전쟁 때 사별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보성 율어 사람으로 경찰이었는데, 마침 제 고향인 화순 능주에서 근무했습니다.
제가 일본 다녀 온 것을 능주에서 몇 몇 사람은 알고 있었는데, 도중에 그 소리가 시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결혼을 엄청 반대했습니다. 처녀 몸으로 일본 갔다 왔다는데 몸이 온전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남편과는 큰 어려움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지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딸 하나 임신해서 겨우 8개월 정도였는데, 남편이 안타깝게도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뒤 큰 아버지가 아들이 많아 아들을 입양해 지금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본에 다녀 온 사실은 집안 형제간하고 아들과 딸만 알지, 아무리 친한 사람도 얘기를 지금까지 못했습니다. 자꾸 일본군 위안부 생활하다 온 것으로만 생각하니까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해 왔고, 지금까지도 가까이 지내던 사람은 물론 요양병원에 들어오기 전 생활하던 동네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해 왔습니다.
<건강상태>
병원 약에 의지해오다 더 이상 혼자 지낼 수 없어 요양병원 생활을 한 지가 몇 년 됩니다. 온 몸에 기력이 떨어지고, 입맛도 없어 제대로 먹지 못한 형편입니다. 당뇨도 심한데다, 걸음걸이도 휠체어 없으면 걷기도 힘듭니다.
<바램>
이제 구십 가까이 된 상태에서 바라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일본에까지 데려다 그 고생을 시켰으면, 당연히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잘못했다고 사과도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부모님과 떨어진 채 그 어린 아이들한테 그런 일을 시켰던 것인지, 그리고 왜 아직까지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가 없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한이 풀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2017. 3. 30.
진술인 원고 김재림
광주지방법원 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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