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군 소난지도 전경. 이곳은 구한말 충청·경기 의병의 항일투쟁 거점이었다. 당진군 제공
여름철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충남 당진의 섬 소난지도가 구한말 항일의병의 투쟁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김상기 충남대 역사학과 교수는 17일 공개한 ‘당진의병과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 연구 논문에서 “소난지도는 구한말 충청·경기 의병들의 항전지”라고 밝혔다. 김 교수 논문을 보면, 소난지도 의병 활동 기점은 크게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과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킨 1907년이다.
1906년에는 최구현 의병부대, 1907년에는 홍원식 의병부대가 중심을 이뤘다. 최구현·홍원식 의병대장은 모두 구한말 군인 출신이다. 최구현 의병은 1906년 5월10일 면천성을 공격해 일경과 전투했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경에 밀려 같은달 16일 최구현 대장과 36명이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2003년 발견된 최구현 의병대장의 묘지기록에 따르면, 당시 소난지도에는 경기 화성의 홍일초 부대 40여명, 서산의병 김태순 등 28명, 홍주의병 차상길 등 15명 등이 있었다. 이들은 8월에 면천군을 공격해 총과 실탄 등을 노획하기도 했다.
홍원식은 1908년 3월 초 의병 70여명을 이끌고 당진읍으로 진군해 밀정을 처단하고 순사를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이에 일경은 기관총을 동원해 소난지도에서 의병 41명을 사실하고 9명을 체포했다고 한다. 목격자인 주민 조예원(1980년 사망)씨는 74년 조사에서 “음력 2월12일(양력 3월15일)~13일 일경이 상륙하려 하자 50~100여명의 의병이 막았다. 일경들은 나무 뒤에 숨어 피하다 의병의 총탄이 떨어지자 상륙해 (의병을) 파리 잡듯 했다. 대장 홍일초는 절벽에서 뛰어내렸는데 중간에 걸려 죽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홍성경찰분소는 “홍일초가 투신해 행방불명됐다”고 보고했다.
1906~1908년 당진 소난지도 주요 전투 상황도. 당진군 제공
김 교수는 논문에서 “홍원식은 충남에서 무장투쟁을 하다 부상을 입고 1914년 귀향했다. 제암교회 권사로 있으면서 구국단체를 결성하고 계몽운동,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제암리 교당 학살사건 당시 순국했다. 행적 등으로 미뤄 홍원식이 곧 홍일초”라고 밝혔다. 또 “소난지도는 충남 북부와 경기 남부를 잇는 요충지로, 충청·경기 의병들의 교두보이자 일제 강점기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산실이 됐다”고 의의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19일 당진시청에서 열리는 ‘당진지역 항일독립운동과 사적지’ 학술대회에서 이 논문을 발표한다.
충남 당진군 소난지도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여서 충청·경기 의병들의 항일투쟁 거점이 됐다. 당진군 제공
김홍장 당진시장은 “소난지도 의병들의 활약상은 1970년대 기록 발굴이 시작되고 1979년 석문중 학생·교사 등이 의병총으로 불린 가무덤과 바닷가에 흩어진 유골을 수습해 의병총을 조성하고 소난지도의병기념탑이 세워졌다”며 “해마다 의병의 날인 6월1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소난지도의 항일투쟁 역사를 발굴하고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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