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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벵기똥과 아구사리동산

등록 2018-01-17 15:08수정 2018-01-17 20:28

이야기 담담
정은영
광양 공감#22 마을문화기획자

벵기똥. 얼음 창고가 있던 것에서 유래하여 빙고등이란 지명을 얻었고 현재는 나이 지긋한 마을사람들에 의해서만 기억되어져 벵기똥이라 불린다. 전남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산저마을 뒷산 산등을 이르는 이곳엔 역사의 아픔이 돌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라 전국으로 기세를 떨치고, 놀란 위정자들이 불러들인 외세에 대항해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공방전을 벌이던 1894년 12월7일. 서쪽 인근 장흥에서는 이방언농민군이 벽사역, 장흥부에 이어 강진현까지 함락시켰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 섞인 소식이 들려온다.

8월부터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남 동부와 서부 경남 진주까지 출병하며 세력을 넓히던 영(남)호(남)대도소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하동전투에서 패배한 데 이어 여수 좌수영 공격에 연거푸 실패한다. 주력부대를 순천부 순천성에서 광양으로 옮긴 김인배 영호대접주는 하얗게 눈 덮인 백운산을 바라보며 그날 밤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다. 고향 김제에서부터 함께 곁을 삼던 처남 조승현을 돌려보내며 “장부가 사지에서 죽음을 얻음은 떳떳하나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구나”라는 유언을 전한다.

상현달이 오를 때, 스물다섯 활짝 피어나던 녹두꽃 김인배의 짧은 생이 혁명의 혈기를 그대로 지닌 채 떨어졌다. 유당공원에서 참수되어 객사에 효수되었다. 수접주 유화덕과 봉강접주 박흥서를 비롯해 이름 없는 농민군의 수백 수천 주검이 벵기똥에 처참히 버려졌다.

아구사리동산. 봄이면 산에 진달래보다 보름 먼저 노랗게 피어나는 아구사리꽃, 광양시 옥룡면에서 구례와 지리산 입구 화개로 넘어가는 860m 백운산 한재 일원은 생강나무라고도 하는 아구사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산사람들에게 아구사리동산으로 불렸다. 이곳은 1948년 제주4·3항쟁의 진압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에 의해 일어난 여순항쟁의 불꽃이 군·경 진압군에 쫓겨 그 발걸음을 산으로 옮길 때부터 전쟁 기간 내내 빨치산의 집이고 훈련장이자 집회의 장소였다.

아구사리는 토벌대에 쫓기던 산사람들이 노출이 쉬운 겨울, 꺾어 불을 지피면 연기가 많지 않아 솥을 끓이고 언 발을 데우는 긴요한 나무였다. 또한 제일 먼저 산등성이에 꽃이 피어나 시린 겨울의 끝과 봄의 처음을 알리는 나무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절명의 순간을 함께하던 생명의 나무이기도 했다.

<남도 빨치산>의 저자 정관호는 “우리는 그래서 산으로 들어갔고, 생존을 위해 살며 싸웠고, 그 본디 사명을 다 하다가 끝내는 괴멸되었다. 이는 나와 함께 있었던 그 형제들의 이야기요. 새파란 젊음으로 산화한 자매들의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언제부턴가 이곳 아구사리동산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 곁으로 한 사람씩 잠들어 모이고 있다. 살아 같이 머물던 동산에 죽어서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인배 영호대접주와 농민군이 참수되었던 광양읍 유당공원에는 많은 비석이 세워져 100년 넘게 보존되고 있다. 대표적 친일파 이근호, 조예석. 그리고 김개남 장군을 척살하고, 전봉준 장군을 서울로 압송한 이도재, 폭정에 못 이겨 일어난 광양민란 진압의 공을 인정받은 윤영신의 공적비가 그것들이다. 그러나 인근 어디에도 역사의 거센 물결 한가운데서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달래고 그 뜻을 기리는 안내판이나 표식조차 없다. 아구사리동산에 대한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리고 시린 역사는 시간에 쫓기듯이 쉽게 사라져 간다. 이 땅 민초들의 역사, 이는 곧 우리 마을의 역사요, 우리 선대의 삶 자체이다. 잊혀져가는 아픈 역사를 찾아 그 뜻을 살피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놓쳐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슬기로운 마을생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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