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항소심 재판이 끝난 뒤 김재림(88) 할머니가 `73년을 기다렸다'는 팻말을 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시민모임 제공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소원을 풀어줬으면 좋겠습니다.”
31일 오후 광주고법 204호 법정에서 광주고등법원 제2민사부(재판장 최인규)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김재림(88) 할머니가 말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에 끌려가던 김 할머니는 이날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재판의 원고로 나왔다. 김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가족 등 4명은 2014년 2월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2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을 내린 뒤 첫 항소심 재판이어서 관심이 쏠렸다.
1944~45년 일제에 강제동원된 10대 초·중반의 소녀들이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1944년 5월말 “여학교에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에 갔던 김 할머니는 1945년 10월말까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제작소에서 일하고도 임금 한 푼 받지 못했다. 1944년 12월 대지진 때 무너진 건물더미에 묻혀있던 김 할머니는 가까스로 구조됐으나, 함께 도망치던 사촌 언니는 주검조차 찾지 못했다.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귀국한 김 할머니는 결혼해 남매를 낳은 뒤 남편과 사별해 평생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소송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은 이날 재판이 끝난 뒤 광주지법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은 2012년 10월부터 광주지법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3건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양금덕(89) 할머니 등 5명이 제기한 첫번째 소송은 항소심까지 승소했지만 2015년 7월부터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계류 중이다. 이 사안은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고의 지연 의혹을 받고 있다. 김 할머니 등이 제기한 2차 소송도 지난해 8월 1심에서 승소했고, 김영옥(86) 할머니와 피해자 조카 등 2명이 지난해 8월 제기한 세번째 소송도 1심에서 승소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이 불복해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날 재판에 참여한 미쓰비시 쪽 변호인은 “유사한 소송이 현재 대법원에 계류된 만큼 그 결과를 보고 선고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원고 쪽 변호인은 “이번 사안은 지난 30일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린 사건과 쟁점은 동일하다. 원고가 고령인 점을 고려할 때 선고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변론 종결 뒤 원고들의 의사를 반영해 애초에 12월 중순 이후로 논의됐던 선고 기일을 12월 5일로 지정했다.
2102년 10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첫 손해배상 제기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89) 할머니가 31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민모임 제공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소송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은 이날 재판이 끝난 뒤 광주지법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일제 전범 기업 신일철주금에 대한 재상고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을 환영한다”며 “원고들의 나이가 90대 전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전범 기업들은 원고들에게 서둘러 사죄하고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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