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안성 갈전마을 방송국 촬영 및 편집 담당 김영석씨가 김장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고 있다. 이정하 기자
28일 오전 8시30분 경기 안성시 미양면 갈전리 마을회관. 고무장갑을 낀 노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회관 경내가 떠들썩해졌다. 마을 노인 10여명이 전날 절여둔 배추를 씻고, 김칫소를 만드느라 분주히 손을 놀렸다. “언니는 이틀 새 더 젊어진 것 같어.” 할머니들은 김칫소를 버무리며 화기애애한 덕담을 나눴다. 회관 밖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 시려 죽겠는데 영감들은 다 어디 간 거야.” 60대로 보이는 남성이 회관 안팎의 풍경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아직 카메라가 낯설고, 모든 게 서툴러요. 지금 촬영한 영상도 죄다 엉덩이만 찍혔네요.” 영상 담당 김영석(64)씨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김씨는 지난 11일 개국한 ‘은총의 갈전마을 방송국’ 촬영 및 편집 담당자다. 줌인·줌아웃을 섞고, 카메라 위치도 다양하게 바꿔보는 등 앵글을 다채롭게 구성하느라 애쓰는 모습이었다.
갈전마을은 안성시가 공모한 마을공동체 사업에 선정돼 5천만원을 지원받아 안성의 첫 마을방송국을 만들었다. 마을회관 안에 작은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고성능 카메라와 편집 장비도 갖췄다. 귀촌 18개월차인 김씨는 환갑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이곳에선 청년이다. 100가구 남짓 모여 사는 갈전마을도 여느 농촌마을처럼 주민 대부분이 60대 이상 노인들이다. 이날 모임에서도 김씨는 막내였다. 촬영뿐 아니라 각종 허드렛일이 그의 몫이었다.
“오늘 김장 모습은 ‘제1호 영상’으로 만들어 소개하려고 해요. 일주일에 두번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을 함께 먹는데, 그때 먹을 김장 50포기를 담그는 중입니다. 사실 농촌도 다 기계화되면서 품앗이라는 것도 사라졌어요. 유일하게 ‘김장’만 기계의 힘이 아닌, 이웃의 힘을 보태죠.” 그는 이날 찍은 영상을 마을 유튜브와 블로그에 올릴 계획이라고 했다.
방송국 아나운서는 김씨와 동갑내기인 갈전마을 이장 송영호씨다. 송씨는 7년 전 귀농했다. 처음엔 도시로 떠난 이들에게 고향 소식을 전하고, 농촌의 소소한 일상을 소개하려고 주민 단톡방과 함께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이후 시 공모사업을 준비하면서 주민들을 설득하고 참여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방송국 한다고 하니 선뜻 같이하겠다는 분들이 많지 않았어요. 농번기나 수확 철에는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서 노인일자리 사업을 연계했어요. 농촌에서 시급 1만원은 큰돈이거든요. 하하.” 그는 이 아이디어로 공모사업에서 3천만원을, 노인일자리사업에서 2천만원의 예산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달 11일 개국한 갈전마을 방송국 내부에 촬영 및 편집 장비가 설치돼 있다. 이정하 기자
방송국 개국을 준비하며 주목한 것은 결국 ‘사람 이야기’였다. “도시로 떠났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이야기, 마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새로운 삶을 꿈꾸며 귀농·귀촌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기록으로 남기려고 해요. 사실 농촌생활이 정겹기만 한 것은 아니잖아요. 마을에서 빚어지는 조금 불편할 수 있는 갈등 상황이나 이런 것도 가감 없이 보여드리려고 해요. 투박할 수는 있지만, 정감 어린 방송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갈전마을 방송국 목표는 3~5분짜리 방송 클립을 주 1회씩 제작해 송출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력이다. 각본과 촬영 계획을 짜고 쌍방향 소통을 위한 채널 관리까지 자체적으로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송을 제작하는 틈틈이 지역 대학의 도움을 받아 방송·편집 기술부터 제작 전 과정을 배울 기회를 마련하려고 한다. 단순한 마을 소식지 역할이 아닌 마늘·양파·쌀·배 등 마을 농특산품 판로 확대를 위한 영상 제작도 병행할 계획이다. 송 이장은 “마을 농장이나 공장 일자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어 젊은층이 마을로 유입될 수 있도록 가교 구실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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