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환 감독(왼쪽 첫째)과 강희권 이사(둘째), 김영오씨(셋째)가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 성굴에서 유족 증언을 촬영하고 있다.
“1950년 음력 10월12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굵은 겨울비가 오는 날이었지….”
지난달 23일 <한겨레>와 만난 정낙관(86·충남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씨는 눈물을 흘리며 “그해 겨울에 비가 많이 내렸다”는 말을 되뇌었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버지의 죽음과 겨울비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그는 얼마 전 한 영화에 출연했다. 구자환(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감독이 연출한 <태안>이다. 해방 뒤 한국전쟁 때 극단적인 좌우 대립 속에 천여명이 애꿎은 목숨을 잃은 태안지역에서의 참상을 담은 영화다. 70년이나 지난 옛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인 ‘아픔’을 들어봤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그때 그 말만 안 했어도….”
영화 <태안>에서 정씨는 꺼이꺼이 울며 이렇게 말한다. 14살 나이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1950년의 일이었다. 7월 초쯤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돌더니 지서 경찰과 청년단이 아버지를 잡으러 다녔다. 찾지 못한 아버지 대신 작은아버지가 트럭 짐칸에 실려 끌려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강희권 태안유족회 상임이사는 “이승만 대통령 긴급명령을 받은 충남경찰국이 후퇴하면서 자행한 보도연맹원 학살의 시작으로, 대전 골령골 학살과 같은 시기”라고 설명했다.
9·28 서울수복 뒤였다. 마을로 돌아온 경찰과 청년단이 또다시 아버지를 쫓았다. 한동네 살던 이웃이었던 청년단원은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찾아와 “숨긴 곳을 말하라”며 정씨를 피떡이 지도록 때렸다. 그의 넷째 삼촌과 셋째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 여럿과 함께 ‘빨갱이를 숨기거나 도왔다’며 사기실재 등에서 학살당했다.
“모항 사람 다 죽는다고 소문이 나고 태안이 공포에 휩싸였는데, 밤에 아버지가 오셨어. 내가 ‘다른 데 가서 숨으면 안 되느냐’고 했지. ‘갈 데가 없다’고 하시더니 새벽녘에 나가셨더라고…. 아이고 아버지….”
겨울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숨던 뒷산 대신 마을 앞 섬에 가셨다가 추위를 못 이겨 불을 피웠고, 이를 본 청년단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열네살 소년은 “아비 없는 후레자식” “빨갱이 새끼”라는 손가락질보다도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70년 세월을 살아와야 했다.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보면, 태안 희생자는 △보도연맹 관련 115명(1950년 6~7월)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 136명(~9·28 서울수복기) △부역혐의자 학살(10월~) 906명 △기타 학살 28명 등 1185명에 이른다. 좌익이 1049명, 우익이 136명이다.
<태안>은 정석희 태안유족회장, 강희권 태안유족회 상임이사 등이 해방기와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독립영화 <레드 툼>, <해원>을 제작한 구자환 감독에게 제작을 요청해 만들어진 영화다. 구 감독은 유족회가 펴낸 <태안 민간인학살 백서>와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서’를 토대로 얼개를 짰고, 유족회는 출연자들을 섭외했다.
영화는 강희권 이사와 세월호 사건 유족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유족·목격자와 학살 현장을 방문해 당시 상황을 듣는 과정을 뒤쫓는다. 유족·목격자 32명의 증언을 담았다. 이들은 백화산 자락 사기실재, 안면도 딱쿵골, 이원면 옹동벗, 근흥 안흥항 등 집단학살지 수십곳에서 기름 뒤집어쓴 채 불붙어 죽고, 죽창에 찔려 죽고, 농기구·몽둥이에 맞아 죽고, 바닷가 절벽에서 밀려 떨어져 죽었다고 회고했다.
남은 유가족들은 한동네에 사는 가해자들과 척질 수도 없고, 잊자니 너무 괴로운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다. 구 감독은 “제 고향인 경남 창녕에서도 보도연맹원 학살은 있었지만 점령지는 아니어서 죽이고 죽이는 일은 없었다. 태안은 좌익과 우익이 교차 점령하면서 보복학살이 발생했다”며 “유족들은 체념한 듯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말했다. 원망할 대상을 찾지 못해 (한을) 꾹꾹 싸매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했다. ‘죽으면 다 잊힐 일이니 말하고 싶지 않다’, ‘이제 겨우 빨갱이 소리 안 듣는데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니냐’며 손사래 치는 이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태안지역에서는 서로 죽고 죽임을 반복할 정도로 이념대립이 심했을까. 정석희 유족회장은 “단언컨대 아니다. 시골 바닷가에서 농사짓고 해초 뜯어 먹는 이들에게 무슨 이념이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그는 “보도연맹은 그 시절 (대표적인 공안검사인) 오제도 검사 주도로 좌익 전력자들을 전향하도록 한 단체였다. 공무원들이 목표를 채우려고 서명 받으러 다녔다”며 “사정사정하는 면서기가 안쓰러워 써준 이름이 살생부가 됐다. 죄짓고 죽었으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동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작은 갈등이 커져 학살로 번진 경우도 있다고 했다. 예컨대 봄에 논물을 대려면 아랫논과 윗논이 다투기 마련인데 이런 물꼬 싸움이나 노름판 다툼처럼 소소한 갈등이 전쟁을 만나 광기로 변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당시 열세살이던 정만호씨는 어머니, 형과 길을 걷다가 소원지서로 연행됐다. 인민군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한 마을 아주머니가 “어린게 무슨 죄가 있냐”며 만호씨 등 또래 세명의 포승을 풀어줘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만리포백사장, 형은 신덕리 갯고랑에서 학살당했다. 만호씨는 “무수(무)를 뽑아 던져 놓은 것처럼 주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몸이 성한 곳이 한곳도 없고 피와 모래가 뒤엉켜 누군지 알 수도 없어 짐승만도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민교(77·태안읍 반곡리) 태안유족회 이사는 “아버지는 외삼촌하고 목에 총상을 입고 공동묘지에서 돌아가셨다. 얼굴이 퉁퉁 부어 어머니도 못 알아봤다고 하셨다”며 “공주고를 졸업하고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지원했는데 떨어져 연좌제에 걸린 걸 알았다. 사기실재 주변 야산에는 희생자를 가매장한 민묘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영화 <태안> 제작진과 진행자. 구자환 감독, 유민 아빠 김영오씨, 강희권 유족회 이사, 김주형 조감독(오른쪽부터).
영화는 유가족들의 현재 삶도 보여준다. 보도연맹·부역 혐의(좌익) 유족과 청년단(우익) 희생자 후손들은 따로면서도 함께 살아간다.
“서울에서 장사할 때 청년단 쪽 후손들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기에 기꺼이 돕고 밥도 같이 먹었다”는 만호씨는 “며칠 전 꿈에 어머니가 ‘너 참 고생하고 살았다’며 꼭 안아주셨다. 꿈인지 생시인지 깨고 나서 얼마나 허전하던지 아침 내내 울었다. 너무 슬프다. 이웃이 형제처럼 지내던 때로 돌아가면야 바랄 게 없지만 이제 살길은 화해밖에 길이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일부나마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인민군 등에 의한 희생자 유족인 이숙자(84)씨는 “군청에서 (좌익들) 위령제를 지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라가 (돈을) 대주는 거나 똑같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런 이씨도 “동네 마실길에 아버지를 끌고 간 집 며느리를 만났는데 ‘한 많은 사람끼리 한번 놀아보자’며 손을 잡고 춤을 췄다”며 “후손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억울한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그때 못지않은 현재의 대립과 분열도 걱정했다. 정낙관씨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너무 심하다. 정치인들이 갈등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숙자씨도 “사상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건…. 정치하는 분들도 그렇고 올바르지 못하다”고 말했다.
강희권 유족회 이사는 “정석희 회장의 오랜 노력과 서산경찰서 지하 서고를 뒤져 신원조사서류를 발견한 1기 진실화해위 조사관 최태육 목사, ‘망하는 영화만 만드는’ 구자환 감독이 있어 <태안>이 세상에 나왔다. 유족들이 생전에 억울함을 풀기를 소원한다”고 밝혔다.
2019년 6월 촬영을 시작해 2020년 6월 태안유족회 정기총회 때 가편집본을 선보인 영화 <태안>은 그해 11월2일 제69주기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제11회 태안군합동추모제에서 극장판(91분)이 공개됐다. 하지만 코로나19 등으로 개봉 일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사진 구자환 감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