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생 갈참나무와 아카시아 등이 숲을 이룬 천안 일봉산 산책로, 주변 25개 아파트 단지 주민의 유일한 쉼터다.
2일 천안 용곡동 방면에서 오솔길을 따라 일봉산을 올랐다. 일봉산은 해발 133m에 봉우리가 하나인 야산이다. 일봉산은 경부·호남·전라·충북선 일반열차와 수원을 거치는 케이티엑스(KTX) 고속열차가 통과하는 눈들 건널목과 천안천을 뒤로 하고, 오른쪽으로는 천안역 방면, 왼쪽으로는 아산 가는 대로가 펼쳐진다.
산길은 20~30m 높이의 아카시아와 갈참나무가 빼곡하다. 산에 오른 지 불과 2~3분 만에 주변의 아파트 단지와 도시 모습은 간데없고 맑은 산새 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가득했다. 길은 오르막-평지가 이어진 흙길 주변에 간단한 운동기구와 벤치가 설치돼 있다. 정상에 오르니 1971년 주민들이 세운 백봉정 아래로 비교적 널찍한 공터가 있었다.
도시공원 일몰제 대상인 천안 일봉산이 개발과 보전의 기로에 놓인 가운데 1일 일가족이 용곡동 쪽에서 일봉산을 오르고 있다.
평일 낮 시간대인데도 일봉산은 적지 않은 주민들이 산책하거나 모여 앉아 이야기하고, 명상하고 있었다. “이런 데가 어디 있겠어요. 아파트 문 나서면 금방 산이에요. 한 30분 천천히 걷다 보면 정상이죠.” 이아무개(57)씨가 매일 산을 찾는다고 말했다. 함께 앉아 쉬던 김아무개(55)씨는 “일봉동에 이사 온 지 20년이 지났다. 이 숲에서 아이들이 열매를 줍고 뛰어놀며 자랐다”고 했다.
산 아래쪽 나무 위에는 평상 같은 시설물이 설치돼 있다. 일봉산공원지키기 시민대책위원회(일봉산시민대책위)가 이곳에 아파트를 짓는 이른바 민간특례사업(민특사업)에 반대해 세운 감시초소다. 일봉산시민대책위는 “3년여를 싸웠다. 6월4일이 일봉산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시의회가 재를 뿌리고 있다”며 애를 태웠다.
일봉산 보전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은 이곳이 민특사업이 제안된 도시공원 일몰제 대상이기 때문이다. 도시공원으로 지정됐으나 20년 동안 공원 조성이 이뤄지지 않은 곳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7월1일 공원지정이 해제된다. 민특사업은 민간업체가 미조성 공원의 일부 지역을 개발해 얻은 이익금으로 정부·지방정부 대신 공원을 만들어 기부채납한다는 것이다. 일봉공원주식회사의 민특사업은 일봉산공원 부지 40만2614㎡ 가운데 29.4%(11만8512㎡)에 10~25층 10개동, 1820세대 아파트를 짓고 나머지 70.6%(28만4102㎡)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뼈대다. 주민과 환경단체는 “도시공원을 조성하려고 훼손된 일부 공원 지역을 개발한다는데 개발 방식은 초고층 아파트 단지를 짓는 것”이라며 “민특사업은 허가받은 막개발에 다름없다”라고 주장한다.
천안시의회는 박상돈 시장이 일봉산 운명을 결정하는 주민투표안을 직권 제출하자 수정제안을 내놓았다. 시민단체 등은 사실상 불가능한 제안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6월4일이 일봉산 운명의 날이 된 것은 일몰제 시행 이전에 ‘개발이냐’, ‘보전이냐’를 가르는 ‘주민투표’를 결정하는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15일 21대 총선과 함께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상돈 천안시장 후보는 “이 사업은 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은 하자가 있어 무효다”라는 주민 주장을 받아들여 ‘여론 수렴’을 공약했다. 그리고 당선된 뒤 지난 25일 시장 직권으로 ‘일봉산 주변 이해관계지역 주민투표안’을 시의회에 냈다. 심학수 주민대책위원장은 “애초 민특사업 직권 취소를 바랐으나 시장의 주민투표안에 동의했다. 주민투표 대상은 일봉동 등 6개 동의 유권자 약 12만7천명이다. 투표율이 33.3% 이상이어야 주민의 여론으로 공식 인정을 받고 일몰제 시행 이전에 결과를 공표해야 유효하다. 찬성이 많을지, 반대가 많을지도 예측할 수 없다”고 전했다.
주민투표는 4일까지 천안시의회 본회의가 안건을 의결해 선관위에 통보해야 일정이 시작된다. 주민투표는 23~30일의 홍보 기간이 있다. 이 기간을 23일로 정하면 투표일은 26~27일이 된다. 그러나 이번 주를 넘기면 일몰제 시한인 6월30일 안에 투표 결과를 공표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의회는 “지난해 11월 주민투표안을 표결했으나 부결된 사안이므로 같은 사안을 두 번 심의, 표결할 수 없다. 민특사업이 거론된 천안의 일몰제 대상공원 4곳을 주민투표는 수정 제안을 한다”고 시장의 주민투표안을 뒤집었다. 이에 대해 주민과 시민단체는 △시민 40만~50만명이 투표대상이고 △4곳 대상지의 민특사업 추진 상황이 제각각 다른 데다 △6월30일 이전에 투표 결과를 공표까지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천안일봉산공원지키기시민대책위 회원들이 1일 천안시의회 앞에서 주민투표안 원안 수용을 촉구하고 있다.
일봉산시민대책위는 1일에 이어 2일 시의회에서 주민투표 원안 심의를 거듭 촉구하며 일봉산 보전을 위한 마지막 불씨를 살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차수철 일봉산시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은 “현재 일봉산 민특사업은 환경영향평가 보완 단계까지 통과해 행정적으로 실시계획 인허가와 도시관리계획 변경 절차만 남겨둔 상태”라며 “주민투표 원안은 시민이 투쟁해 얻은 일봉산 보전을 위한 유일한 기회다. 시의회는 주민 의견을 받아들여 시장이 낸 원안대로 주민투표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예전에는 저기가 소전건널목이야. 평생을 저 건널목을 건너 이 산에 올랐어. 여길 봐 주변이 다 아파트여서 주민들이 갈 데가 없잖아. 가꾸기 힘들면 그냥 놔두면 되지 왜 망가뜨리지 못해 지랄들인지…” 일봉국민학교 출신이라고 밝힌 김아무개(78)씨는 “이래서 (더불어민주당에서 미래통합당으로) 시장이 바뀐 건데도 시의원들이 정신을 못 차린다”며 손사래 쳤다.
글·사진 송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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